무기력 시기를 지나는 중입니다.

by 쑥라떼


1. 한동안 뭘 해도 집중이 안 됐다. 명치 깊숙이 무언가 진동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초조함과 긴장감에 절여지다가, 바람 빠진 인형처럼 푹 가라앉았다. 발끝으로 떨어진 자기 확신. 일절 도움이 안 될 말을 되뇌기 시작했다. 내가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인가. 감을 잃었나. 아니 재능이 없나. 열심히 하는 거 말고 잘하는 거 말이야. 시장에서 내가 어디쯤 되는 것 같냐고.


아주 작은 불안으로 시작한 소리가 마구 불어나더니 온종일 웽웽 기어코 중심을 흔들었다. 온점을 찍어둔 프로젝트 파일을 열어서, 여기저기서 물어온 좋다는 것을 다 붙이고 고쳤다. 이도 저도 아닌 혼종이 생겼다. 일주일 정도 시간과 체력을 퍼부은 삽질이 끝났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파트너들에게 대대적인 수정 선언을 철회했다. 허허 웃고 끝난 해프닝 같았지만 그즈음부터 서서히 일의 동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2. 동력을 잃었다. 1월부터 다섯 편의 릴스를 올리겠다, 유튜브를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사이드 프로젝트는 다음 편을 두 달째 올리지 못했고 포트폴리오는 제자리걸음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힘이 나지 않는다. 죄책감만 쌓여 간다. 게으름이나 의지의 부족, 완벽주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언가 다른 원인이 있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을 잃은 것 같았다. 원동력. 분노를 원동력으로 쓰던 시기가 지났고, 초조함과 불안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런데 내 불안이 외부 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여러 차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3. 지연 또 지연. 프로젝트가 밀렸다.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겠지. "대표님, 정말 다음 달에는 완성이 될 수 있을까요? 이번 주에는 답변을 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보수적으로 보아도 충분한 일정일까요?" 수차례를 되물으며 약속을 받아내려 애쓴다. 조율 또 조율. 각자의 개인 사정과 이해 관계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하는 게 내 위치였다. '그럴수도 있지'하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나는 휘어지기 전에 꺾였고, 겉과 속이 달라 내구성은 형편없었다. 매일 어쩔 수 없다고 마음 먹은 것과 달리, 일 하는 데 쏟는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비대했다.


4. 네 달 만에 심리 상담을 받았다. 지난 시간 선생님은 다시 올 이유를 만들 수 있게 딱 1회기만이라도 미리 결제를 해두라고 말했다. 언젠가 꺼내쓸 비상금처럼 남겨두고 있던 회차를 예약했다. (선생님, 오늘 같은 날을 예상하셨던가요.) 의자에 앉자마자 “난 하나도 바뀐 게 없다”고 푸념을 쏟아냈다. 수십회 상담하고 뭐가 달라져야 하는데 난 또 불안해서 종종거리고 있질 않냐고. 수용과 적응을 하는 해로 만들겠다는 다짐이 너무 무색하게!


"이미 어느 정도 수용은 된 것 같은데요?" 충분히 '나아졌다'는 짧은 코멘트와 함께 다음 미션을 받았다. 이제 상황을 분리해 보자고. 나의 역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전달만 하는 사람'으로 일을 해보라는 조언을 얻었다. 그러면 화가 날 수가 없을테니. 누군가는 가정의 막내딸, 아이 엄마, 취미 부자, 아이돌 덕후. 다양한 '나'로 자신을 갈아 끼우는 동안, 나는 불과 상담 직전까지도 '나' 하나 뿐이었다. 이 브랜드를 잘 출시해야 하며 여러 사람과 문제 없는 소통을 하면서, 자기계발도 해야 하고 여행도 가고 싶고 집도 꾸미고 싶은 욕심많은 나.


5. 프리랜서는 불안함이 일상인 직업이었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몇 퍼센트의 프리워커 이전까지 차마 일을 가려 받지 못하는 삶과 언제든 나의 선택보다 타인의 결정에 의해 이별할 수도 있는 삶. '약속'하기 어려운 일상이 프리랜서의 숙명이라고 하지. 이것들과 익숙해지기까지 몇 번 더 깨지고, 울고 자신감이 발끝을 굴러다니다 괜찮아지는 과정을 겪어야 할까.


6. 늘 불안과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말만' 하고 치고받기에 바쁘다. (몇 달 전에도 '불안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라 했었죠. 이렇게 말과 행동이 다르긴 참 쉽습니다) 어딘가 믿을 구석을 찾고 싶다. 맘이 약해졌다는 거지. 나도 정돈하지 못한 날 것의 마음을 주변 사람에게 던져 버릴 순 없다. 이럴 때 GPT가 제 몫을 해낸다. 적당히 객관적이게. 해결책을 말할 땐 부드럽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주문을 곧잘 소화하는 AI자아에게 참 고맙다. 다만, GPT가 따끔한 충고와 다정한 솔루션을 만드는 시간 1분. 내가 변하는 속도는 한참 느리다.


7. 10평대에 볕 잘 드는 투룸 빌라. 월세도 안 오르고, 동네도 조용하니 혼자 살기 이만한 집도 없을 텐데 버릇처럼 '이사 가고 싶다'는 말을 뱉곤 했다. 한동안 떠오르지 않던 욕구가 치솟아서 부동산 사이트에 올라온 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곤 즉흥적으로 집을 보고, 가계약까지 걸어버렸다. '네가 좋다면 가는 거지'라며 말을 아끼던 친구들 뒤로, 한 친구가 짧고 굵은 펀치를 날렸다.

"라떼님, 그거 화풀이에요."


8. 답답한 마음에 환경 탓을 하며 큰 판을 벌였다. 며칠을 이사갈 곳에 정신을 두고 도피성 도파민을 맛 본 셈이다. 무모했다. 단점이 너무 많은 선택이었거든. 가계약을 파기했다. 역대급 홧김 비용을 일시불로 지급한 뒤무기력 시기에 벌어진 일련의 감정을 나열해 보았다. (아, GPT에게 구구절절 고민 상담을 해둔 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9. 마음이 한 뼘 자라났을 때, 으스대지 말라고 했다. 기대감이 무너질 때, 우울감이 덮칠 때, 누군가 대신 답을 찾아주길 바라며 나약해질 때, 내가 그다지 좋지 않을 때. 이 시기는 또 올 테니까. 지금 무사히 통과해도 채 몇 달 사이에 또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바라는 건, 하나의 시기를 거치며 만들어지는 나의 (흑)역사를 양분 삼아 빠르게 통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10. 한고비 넘어 다음 장. 최근 깨달은 패턴이 있다. 1) 아침에 쓰는 자기 확언 문장이 효과가 좋았다. 2) 몸과 공간은 너무나 투명해서 지금 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홧김 비용을 액땜이라 여기며 정신 승리를 마치고, 다시 '무언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부글대다 끓어 넘치기 전에, 지금 나는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나 다시 보자고. 또 왔네 '그' 시기 - 이러면서 덤덤히 지나갈 수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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