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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Dec 14. 2022

우리는 모두 돌봄이 필요하다

[돌봄 선언] 책을 읽고 나누는 생각

 내가 있는 공공의료 공부모임에서 첫 번째 공부할 책으로 "더 케어 콜렉티브"의 [돌봄 선언]이라는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었다. 돌봄, 그냥 무심코 지나치던 단어였다. 돌본다는 개념에 대해 크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돌봄 선언] 책을 읽고 나는 돌봄에 대한 개념을 넓힐 수 있었다. 돌봄은 단순히 가족이나 취약한 사람의 일상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로의 연대감과 친밀감을 기반한 챙김이며, 사회가 구성원들의 안녕을 책임지는 것이다.  돌봄은 사람의 가장 특출난 능력 중 하나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처음에 능력 있는 직장인,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여의도 한복판의 고층 건물에서 회의를 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반면, 능력 있는 사회는 무엇일까? 그런 ‘능력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능력 있는’을 사회에 붙이는 게 다소 어색하다. 대신 튼튼한 사회란 말을 쓰고 싶다. 튼튼한 사회란, 구성원들이 서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관계 속에서 누구 하나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장하는 사회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순기능으로, 좋은 사회는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호하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혼자 있는 사람은 약하지만, 각자의 약점과 강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보완하고 돌볼 때, 집단과 사회는 강해진다.


@PxHere

 

 강한 사람들이 만드는 강한 사회는 허상이다. 우리는 모든 순간 능력 있고, 독립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릴 때나 노인일 때 등 인생의 시기적으로 돌봄이 필요할 때도 있고, 아프거나 경제적으로 추락했을 때 등 위기의 순간도 있다. “상호의존성”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잘 짚어준다. 서로의 독립성,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대신, 우리는 누구나 약해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챙기고 챙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리는 더 강해진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돌봄’ 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한 경쟁이라는 개념 속에서 돌봄과 상호의존성은 점차 빛 바랜다. 능력 있는, 생산성 있는,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의 행보만 주목받고, 그에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시야에서 벗어난다. 각자도생, 스스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러한 경향에서 돌봄은 서비스의 일환으로 사고 팔리거나, 국가가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기관에 위탁하는 것이 된다. 돌봄이 서비스가 된 곳에서 부자는 누구보다 많이 남에게 의존하면서, 자신이 돈을 부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만성질환자 등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돌봄을 요청하는 데 죄책감이나 부담을 느끼게 된다. 경제적 대가 없이 제공되는 돌봄은 자선이라고 여겨진다. 둘 다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가족의 희생으로 돌봄이 지탱되거나, 홀로 남겨지게 된다. 



 

 [돌봄 선언] 은 돌봄을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돌봄은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경제적 보상을 넘어서 연대와 친밀감으로 서로를 돕는 것이다. 지역 내에서는 사람들이 혼자서 이용하기 어려운 공간과 서비스를 공공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물과 식량, 주택과 옷을 필요로 하듯, 사회 안에서의 구성원은 교육과 의료 등 집단으로써의 서비스가 필요하다. 이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이 돌봄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필요한 돌봄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들의 경우, 코로나와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공공시설들이 문을 닫으면서 공공적 돌봄에 대해 역행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시대에 공공 수영장들이 문을 닫으며 사설 수영장들이 많이 생겼다. 기존에 수영을 배웠던 어린이들은 훨씬 비싼 돈을 내고 수영을 배워야 했다. 도서관들이 문을 닫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스터디 카페나  독서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적 공간들은 허락된 사람, 경제적인 여유가 되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 모두가 쓸 수 있는 서비스와 공간이 생길 때, 구성원들은 사회가 그들을 챙기고 돌본다고 느낄 수 있다. 


 긴 숟가락 설화가 있다. 천국과 지옥에 사람들이 있는데,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장소 다 맛있는 먹을거리들이 매일 제공되었다. 다만 제공되는 숟가락이 사람 키보다 긴 숟가락이었다. 천국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음식을 서로에게 떠 먹여 주었고, 지옥의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먹으려 하며 싸웠다. 우리들은 모두 짧은 숟가락과 긴 숟가락을 가졌다. 스스로를 챙길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돌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사람이 서로의 연약함을 알고 서로를 도울 때,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참 살 만한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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