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탓할 수는 없다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주역]에 대한 소개를 읽었다. 주역은 점괘를 풀이하는 책이지만, 내가 읽은 책에서는 점을 잘 치는 방법이 아니라 괘들을 풀이하는 시각에 대해 풀이했다. 괘는 6개의 긴 선과 끊어진 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끊어진 선은 음, 이어진 선은 양이다. 주역의 점괘는 음양의 여부보다 음과 양 괘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주역을 통해 고정된 것은 없으며, 위치와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진료실에서는 의사이고, 운동하러 갔을 때는 회원이고, 부모님과 같이 있을 때는 딸이 된다. 나의 정체는 그때그때 내 주변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라는 정체성, 기억들이 일관되게 존재하지만, 상황에 따라 역할에 따라 나는 달라진다.
이전에 나는 항상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같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공부할 때 어디서든 똑같이 공부하고,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내 행동도 달라졌고, 때로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의지보다 나의 행동을 바꾸는데 더 큰 역할을 했다.
나의 행동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오만이었다. 일시적으로 내 의지를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결국 지치는 시점이 온다. 나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럴 수 없는 상황일 때는 스스로에 대한 과한 채찍질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것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동시에, 남에게도 의지로 본인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지 않냐고 묻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을 간과한 것이라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사정이 있고, 자신이 처한 상황 안에서 행동을 결정한다. 문제를 가진 타인은 자세히 보면 자신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일 수 있다. “하면 되지”는 자신을 다잡는 노력이 될 수 있지만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성공에는 겸손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의 온전한 성공은 없다. 개인의 노력은 빼놓을 수 없겠지만, 때와 시기가 맞아야 그 노력이 결실을 이룬다. 우리는 환경에 의해 움츠리기도 하며,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지금 내가 잘 된다고, 좋은 위치에 있다는 것은 내가 잘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는 주위 환경이 뒷받침해 줬다는 뜻도 된다.
동시에, 나 또한 누구에게는 환경이다. 든든한 지지대가 될 수도 있고, 훼방을 놓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남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갈 때 내가 어떠한 영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된 기억으로는 나의 의대 선배가 있다. 의대 내 수직적인 사회에서 그 언니는 나에게 존댓말을 썼다. 나로서는 문화충격이었다. 나보다 한참 높은 선배인데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지금은 의대 내 문화가 많이 바뀌었지만, 나 또한 지금 있는 봉사동아리 안에서 가능한 평등한 동아리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항상 사람은 그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 한다. 남들에게 단순히 의지로 환경을 뛰어넘기를 바라기도 어려우며, 내가 누군가에게 더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그 사람의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대신 든든한 지지대가 되려 한다. 나 스스로를 대할 때는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되 그 안에서 최선의 반응을 하고, ‘나’의 특성들을 살려야겠다.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무작정 채찍질보다는 이해와 독려, 환경과 상호작용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