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새옹지마
*모든 환자는 가명이며, 각색으로 본인 특정이 불가능합니다.
46세 여성이 새로 접수창에 올라왔다.
“이영란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환자가 한쪽 손으로 다른 쪽 팔오금을 누른 채 들어왔다. 방금 피를 뽑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짧게 인사하고, 환자가 찍은 엑스레이 영상을 띄운다.
“일단 엑스레이 한 번 볼게요. 폐는 깨끗해요. 저기 보이는 하얀 것들은 기관지예요.”
그다음은 건강검진 문진표를 쭉 본다.
“혈압도 좋고, 시력도 괜찮네요. 가지고 있는 질병이 있나요?”
“아, 딱히 없어요.”
잽싸게 체크해야 할 질병들을 한 번 읊는다.
“뇌졸중, 심장병,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결핵, 암 그런 질병 현재 없죠?”
“아, 고지혈증 약 먹고 있어요.”
묻다 보면 이렇게 하나씩 얻어걸릴 때도 있다. 고지혈증 칸에 체크.
“가족 중에는 뇌졸중, 심장병이나 고혈압, 당뇨, 암 없나요?”
“아, 어머니가 고혈압이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족력의 고혈압 칸에 체크한다.
그 후 뒤에 생활습관도 한 번 쭉 본다. 술, 담배, 운동 다 하지 않는다.
“ 술, 담배 안 하시는 것은 좋네요. 운동은 조금만 챙겨하면 좋겠습니다. 주 150분이 기준이니까, 참고하세요.”
운동을 안 하는 환자에게 규칙적인 운동을 권하는 것이 환자들의 웃음포인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웃는다. 돌아보니 무안을 주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환자가 웃으면 딱딱한 분위기도 풀어지고, 짧지만 무언가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든다.
일반건강검진에서의 문진은 내가 하는 정기 업무 중 하나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진료 중 하나이지만 진료 시간 동안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주려 한다. 흉부 엑스레이도 한 번 보고, 의무적인 일은 아니지만 생활습관 항목도 같이 한 번씩 확인하고 있다. 환자가 이 시간을 통해 무엇이라도 얻어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진료를 본다. 문진 후 환자가 웃으며 감사하다 인사하고 나갈 때, 그 순간 뿌듯함이 몰려온다. 동네의사의 일이 작아 보이기도, 커 보이기도 하다.
동네의사는 무엇을 하는가? 지금부터 영업기밀을 좀 풀어보려 한다. 동네 의사는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 하는 건 상급의료기관에 넘긴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환자들이 제일 먼저 접하는 곳인 일차의료기관으로서 기본적인 진료와 경과관찰을 하고, 폐렴 등 급박한 질환이나 심장병 등 너무 까다로운 질환은 정밀한 검사와 진료를 할 수 있는 해당 과의 전문의에게 의뢰한다. 이를 문을 지키는 게이트키퍼라고도 부른다. 의학의 첨단을 달리는 일은 아니어도, 꼭 필요한 일이다.
난 동네의사로 사는 삶에 정말 만족한다. 학생 때보다 훨씬 즐겁다.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생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기쁘다. 나의 역할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의료적인 도움이다. 그동안 열심히 배운 의학적 지식과 진료 경험으로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의사의 기술로써 치료를 한다. 두 번째는 마음적인 도움이다. 심각한 질병이 아닌 환자에게는 안심을 주고, 만성 질환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는 위로를 준다. 어떤 때는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을 듣는다.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병원에서 실습을 할 때는 의사가 내 적성에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공부와 시험은 내 끝까지 차올랐고, 동기들과도 미묘하게 안 맞았다. 제일 힘들었던 점은 내가 병원의 먼지 같다는 생각이었다. 가장 짙게 남은 기억이 병동 내에서 교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무지성으로 뒤를 따르며 교수님과 환자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냈다. 환자 차트를 보며 스스로 공부를 하기에는 많이 지쳐있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그 당시는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하게 된 것은 나에게 큰 전환이자 복이 되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의원에서 따뜻하고 든든한 사람들을 만났고,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도 생겼다. 이러한 변화들이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나의 주 업무는 신체를 치료하는 것이지만,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도움을 주려 한다.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도 쓴다. 옛날을 돌아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 때는 이런 생활이 나를 기다리는지 모르고 당장의 고통에 힘들어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때의 고생으로 지금에 더 감사할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환자에게도, 나에게도 치유적인 이 일을 이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