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상징하는 물건을 하나 꼽아보라 하면 무엇일까? 나는 청진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의료 봉사를 가는 등 병원 밖을 나설 때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고, 튼튼해서 웬만하면 망가지지도 않는다. 환자들이 감기로 왔을 때 열이 있거나 기침 가래가 심하다 싶으면 꼭 숨소리를 들어본다.
“아유, 왜 이렇게 감기가 잘 안 떨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한 번 소리를 들어볼게요. 등 보여주시고 청진기 댈 때 숨 크게 쉬세요.”
등 맨살에 청진기를 대고 좌우 위아래로 움직이며 소리를 듣는다.
“폐에서 폐렴 등 위험한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대신 약간 가래 낀 소리가 나네요. 기침, 가래약을 드릴게요. 며칠 후면 좋아질 거예요. 다만 열이 나거나 기침 가래가 너무 심해지면 오세요.”
청진기는 참 신통하다. 건전지를 채우거나 충전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쓸 수 있으면서 동시에 환자에게서 중요한 단서를 얻도록 도와준다. 질병이 없는 상태의 폐 소리를 들어보면 바람이 굽이굽이 돌아다니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이상이 있는 폐는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낸다. 가장 위험한 폐렴이 있을 때는 빠그락, 거품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천식은 삐-익 하고 공기가 좁은 곳을 통과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가래가 차면 그렁그렁하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의 경우, 보통은 두근두근 규칙적인 소리가 난다. 하지만 심장 역류를 막는 판막에 문제가 생기면 드르륵 잡음이 들리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는 병, 부정맥이 있으면 불규칙한 두, 둥 소리가 들린다.
폐와 심장은 자신의 상태를 소리로 표현한다. 청진기는 그 소리를 온전하고 또렷하게 내 귀까지 배달한다. 하지만 청진음을 내가 얼마나 잘 해석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 사람들은 청진기를 갖다 대기만 해도 질병을 금방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리를 구분해 내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내가 소리에 얼마나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지, 얼마나 관련 지식을 알고 듣는지가 올바른 진단의 핵심이다. 처음 의사 일을 시작했을 때 폐와 심장 소리는 나에게 수수께끼였다. 내가 듣는 소리가 이상한지 정상인지 야바위 컵처럼 헷갈렸다. 아무리 폐음 심음 이론을 빠삭하게 알아도 결국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이었다. 폐렴 소리를 한 번 듣는 순간 ‘아, 이것이 폐렴 소리이구나’ 깨달았다. 그 후로 폐렴 소리는 안 놓친다.
사람의 마음도 폐와 심장과 비슷하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통은 말로 표현되고, 때로는 표정이나 글로 전달되기도 한다. 어떤 마음의 소리는 예술이라는 청진기, 즉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그중에서도 그림을 좋아한다. 이전에는 그림을 봐도 그냥 그림이려니, 무심하게 봤다. 그나마 좋아하는 그림들은 예쁜, 보기 좋은 그림들이었다. 그러한 나를 그림의 매력에 풍덩 빠지도록 해준 계기는 천경자 작가의 전시였다.
서울에 갔는데 약속 사이에 시간이 떠서 서울시립미술관에 들렀다. 마침 오후 시간 대에 가서 도슨트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설명을 듣기 전 미리 작품들을 쭉 둘러봤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표현했구나, 신기하다 생각이 들었지만 그 외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그림이었다. 한 바퀴 돌고 나니 정규 도슨트 시간이 다 됐다. 단발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약간 있는 중년 여성 도슨트가 모인 사람들 앞에 섰다. 그는 간단히 인사한 후 그림 사이를 돌아다니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천경자 작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그가 많이 그린 꽃과 뱀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등, 천경자 작가의 삶이 도슨트의 입을 통해 술술 풀어져 나왔다.
천경자 작가는 삶에 굴곡이 많았다. 가족의 죽음, 불행한 결혼생활 등 그는 삶을 살아가며 여러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었다. 그는 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한이 많아 자신의 머리에 꽃과 뱀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기며 끔찍이도 아끼다가, 삶의 막바지에 대부분의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래서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경자 작가의 상설전시관이 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다시 그림들을 바라봤다. 화가의 자화상을 보던 중 갑자기 그림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정확히는 그 그림을 그린 천경자 화가가 나에게 물었다. ‘내 삶을 잘 들여다보았니?’ 초상화 속 그의 표정은 괴로움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표정이었다. 삶이 그를 아프게 할 때 그는 그림을 붙들고 창작을 이어나갔다. 그림으로 인해 그는 자유를 얻었고, 살 수 있었다.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경자 작가에게는 그림이 그의 숨결이고 심장박동이었다. 그는 숨 쉬듯이 예술했다.
그 후로 나는 미술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시간이 나면 전시회도 갔다. 처음에는 설명 없이 그냥 보고 두 번째로는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한 번 더 본다. 그러면 고요 속 그림의 선율이 들린다. 그 소리는 내 마음을 울린다.
아무 관심 없이 그림을 보면 단순히 형태와 색깔이 그려진 종이로 보인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고 그린 작가를 이해하는 순간 그림은 청진기가 되어 나와 작가를 잇는다. 나는 그와 대면하여 둥둥 울리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신체든, 마음이든 앎과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야 그 소리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숨소리와 심장소리를 아무 지식 없는 사람이 들으면 서로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듯, 마음의 소리 또한 들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다 똑같은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그 소리를 자신의 방식대로 왜곡하여 듣거나 자신의 재밋거리로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런 순간 소리를 내는 사람의 모습은 지워진다. 내가 의사 일을 하며 신체의 소리를 알고 해석하게 된 것처럼, 마음의 소리 또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러려면 계속 귀를 쫑긋 세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