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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Apr 02. 2024

단정한 루틴과 새로운 경험 사이 줄다리기

비워야 채워지는 하루

고단하다. 수면이 부족하다. 잠에 못 들어서가 아니라 절대적 수면 시간에 부족에 기인한다. 하루를 꽉 채워 살아야 한다는 강박, 혹은 욕심은 만성 수면부족을 낳고 몸을 혹사한다. 그럼에도 신체적 고달픔과 삶의 무료함 중에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우선 내가 기본적으로 꾸준히 하는 루틴을 살펴보고 무엇을 조정해서 수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겠다.


1. 공복 체중 측정: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하는 일. 소변을 보고 잠옷을 훌쩍 벗는다. 그리고 블루투스 체중계에 올라간다. 스마트폰에 연동되는 나의 체중, 신체 점수, 신체 나이를 확인한다. 요즘은 95~100점, 31~32세를 유지하고 있다. 인바디만큼 (사실 인바디도 정확하지 않다) 정확하지 않으나 추세를 보기에 좋다. 몸은 어쩜 속일 수가 없다.


2. 감사일기와 Sarr 다이어리 : 감사일기를  펴서 오늘의 날짜를 쓴다. 오늘의 명언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그래. 열심히 살아보자.‘ 다짐하고 ‘현재 감사한 것 세 가지’를 쓴다. (1) 건강한 신체 (2) 따뜻한 집 (3) 할 일이 있음에 혹은 만날 사람이 있음에 , (3)을 빼고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 후 직접 강의를 듣고 텀블벅에서 구매한 Sarr다이어리를 펴서 오늘 할 일을 체크리스트에 적는다. 공복 체중도 함께. 하루의 마지막은 두 다이어리에 ‘좋았던 일’과 ‘실행에 성공한 일’을 기록하고 감정을 남긴다.


3. 운동: 웨이트는 4 분할로 진행한다. 가슴, 등, 하체, 어깨 순서이다. 가슴을 하고 나면 길항근인 등을 한다. 그다음 날 어깨를 하기에는 이미 상체가 털려있다. 하체가 딱이다. 하체를 하고 나면 또 ‘어깨에 소홀했구나.’ 싶어 진다. 주 6회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실내 유산소(트레드밀, 천국의 계단)’를 했었는데, 최근 퍼포먼스 향상에 있어 ‘디로딩’과 ‘피로 해소‘의 중요성을 알게 된 뒤로는 웨이트 횟수를 주 3회 정도로 줄였고, 야외 러닝의 횟수를 늘렸다. 5km를 뛰는 것도 지루했는데 이제는 10km를 음악 없이 자세와 호흡에 집중하며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무게 욕심을 줄이고 속근을 강화시키는 러닝에 관심이 높아졌다. 이때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은 동네 러닝 모임이다. 과거에는 걷기 벙개에만 참석했지만 요즘은 내가 러닝 벙개를 연다. 나보다 러닝에 더 관심이 높은 사람들과 달리다 보면 새롭게 알게 되는 게 있어서 좋고 무엇보다 중도포기가 어렵기 때문에 유용하다. 헬스는 고립이지만, 유산소만큼은 종종 어울림을 즐긴다.


이렇게가 매일 내가 하는 일들이다. 우선 1, 2번은 합해서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2는 하는 것이 더 시간을 아끼는 길이다. 같은 사건도 2번 이상 복기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인생 2회 차 효과가 있다. 3이 문제다. 운동이 직업도 아닌데 하루에 2-3시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 쓴다. 결론은 명확하다. 운동을 줄여야 한다. 횟수와 시간 모두. 성공한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이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독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어디선가 보았는데 공감한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 법이다. 아웃풋을 내고자 하는 ‘작가’ 무하는 더 많은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하다. 인스타를 줄이고 활자의 세계, 그리기를 위한 레퍼런스의 세계 속에서 더 허우적거려야 한다.


인생을 패키지 관광처럼 살려고 했다. 하루에 스케줄이 단순하면 열심히 사는 것 같지 않고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버리는 것 같았다. 더 특별하고 새로운 경험, 이벤트로 꽉 채운 하루를 살고자 했다. 그런데 이벤트의 횟수가 아닌 하나의 이벤트에 집중하여 그것을 오롯이 내 것으로 소화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된 사건이 생겼다.


그 수요일은 2시에 '당신의 고전, 300선(대충 이런 제목)'을 보러 갔다가 문화의 날이니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5시 10분에 '추락의 해부'를 볼 예정이었다. 추락의 해부를 본 다음에는 약 10년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바에 가려고 예약을 해두었다. 이벤트가 세 개인 날. '헬스'를 어딘가에 껴 넣어야 했다. 새벽 6시 오픈런 밖에 없었다. 일단은 그렇게 계획을 해두었다. 뿌듯했다. 몇 개는 취소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대견한 느낌.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이벤트 3개를 앞둔 전날, 여느 때처럼 헬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러닝방에 문화비축기지에서 인터벌 러닝을 한다는 벙개가 올라왔다. 헬스를 마치면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서 패스를 하려고 했는데, 벙개를 연 K는 만나는 시각을 늦춰주었다. 그는 러닝을 이야기할 때 눈이 은은하게 돌아있었다. 그러면서 같이 달리는 사람을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래, 저게 찐이지.’ 덕후의 눈빛이었다. 러닝, 등산, 술, 먹는 것의 덕후로 보였다. 내가 경험한 모습은 ‘러닝’ 덕후의 모습. 아무튼, 그와 거의 6km를 달리고 걸었다. ‘유튜브’로만 러닝을 공부하고 ‘혼자’ 뛰었다고 하는데 재야의 고수였다. 본인은 SNS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내향적 관종 뜨끔). 나의 달리는 자세를 앞에서, 뒤에서 보면서 원인을 파악하고 처방까지 해주었다. 달리기가 더 편해졌고 기록도 좋아졌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모두 내 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고맙다. 헬스장에서 여느 때처럼 트레드밀을 달리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서 뛰는 것을 선택한 내가, 그리고 체력이 받쳐주는 노력을 지금까지 해온 내가. 5분 22초 페이스를 찍었다. 업힐, 다운힐 포함한 구간에서. 어쩌면 난 족쇄를 찬 코끼리 같았을 지도, 내 그릇을 간장 종지만큼이라고 정해놓은 것일지도.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체력과 신체를 이미 가진 것이었다. 그가 진단하고 처방해 준 사항을 이곳에 정리해 놓는다.


(1) 나는 골반이 전방경사가 심하다 보니 업힐에서 허리를 뒤로 꺾는다. 그래서 올라갈 때 더 힘들다. (진단) >> 골반을 후방경사로 만들고, 상체 각도를 앞으로 숙인 다음 3m 정도 앞을 보고 달린다. (처방)

(2) 달릴 때 발가락 끝으로 지면을 찬다. (진단) >> 발가락으로 밀지 말고 무릎을 들어 올릴 것, ‘통통’ 느낌으로 (처방) : 선생님, 그런데 말이죠. 그게 힘들어요. 업힐에서는 무릎을 더 올려야 경사보다 다리가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래도 상체를 숙이니까 정말 훨씬 쉬웠어요. 복근에도 제가 힘을 안 주고 있더라고요. 헬스를 시작하고 등에 힘주고 어깨를 귀와 멀어지게 내리는 것에 신경 쓰다가 복근에 힘주는 것은 또 잊고 산 것이지 뭐예요. 참 인생, 쉽지 않아요. 힘주고 살 곳이 왜 이렇게 많죠. 또 승모에는 힘을 빼야 하고요.

(3) 햄스트링이 약하다. 마지막 뛸 때, 특히 오른쪽 다리로는 지지보다는 땅을 차고 있다.  (진단) >> 햄스트링을 강화하고 중간에 스트레칭을 해주어라. (진단) : 다음날부터 레그컬을 하체 루틴에 넣었다. 제일 힘들고 하기 싫었는데 약해서였다. 이제는 햄스트링을 더 단련하기로 했다.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만큼 레그컬도 즐기기. 균형 잡힌 근육을 디자인하자. 삶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면 마법처럼 변하는 것은 몸과 글밖에 없다.

(4) 도파민 중독, 초반에 너무 달린다 (진단) >> 느려도 되니 천천히 지속할 수 있는 속도로 달려라 (처방)

(5) 체력이 아니라 마음이 꺾였다. (진단) >> 마음을 꺾지 말고 끝까지 달려라. 할 수 있다. 충분한 체력이다. (처방) ‘선생님, 제가 이것까지 잘해야 할까요. 적당히 잘하고 싶어요. 선수될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또 가능하니까 해보고는 싶어 져요. 프사오에서 하나 더, 더 무겁게를 외치며 주변 사람을 응원(?)하는 제 모습이 겹쳐 보였어요. 미러링 당했습니다. 뭐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매우 고맙습니다.’


결론적으로 낮에 걷기만 했던 문화비축기지를 ‘밤’에도 가보았고(조명이 멋졌고), 그곳을 큰 원과 작은 원으로 달리면 1km이며 적당한 업힐과 다운힐, 평지가 섞인 러닝 훈련하기 좋은 공간이라는 것도 알았다. 사람이 적어서 뛸 때 진로 방해가 없는 것도 좋고. ‘실내 말고 밖에서 함께 달려볼까?’ 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러닝 벙개는 러닝과 내 몸에 대한 세계관을 넓혀주었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세계관을 넓힌다. 경험하는 것만큼 내 세계가 넓어진다. 해봐야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learnig by doing. 내가 대학원에서 교수님께 배운 가장 큰 깨달음. 머리로 암만 해봐야 모른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에서도 멀리서 산을 보고 판단하는 머리 좋은 사람과 직접 올라가 봐야 아는 머리 나쁜 사람의 비유가 나오는데 나는 사람이라면 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도 소설가는 후자라고 했다.


결국 그 수요일에는 이벤트 세 개 중 두 개는 취소했고 헬스도 못 갔다. 전시회, 영화관에도 갔더라면 꽉 찬 하루를 보냈겠지만 어느 하나에서도 깊은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세 이벤트 중 하나였던 '벼르던 바에 방문하기'를 달성하여 쓰고 있다. 거의 10년 전, 이곳이 생겼을 무렵부터 페이스북으로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책을 좋아하다가 술까지 즐기게 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정혜윤의 '책과 술'이란 에세이였나, 아무튼 그런 류의 에세이를 읽으며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경기도에서는 너무 멀었다. (유퀴즈에 나오실 때는 내가 저기 못 가게 되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했다. 사장님 죄송) 1년 전 마포로 이사를 와서는 심지어 내가 자주 가는 망원시장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껴두었다. 거의 10년을 멀리서 보다가 오늘 처음 와보았다. 인테리어, 분위기, 음악, 다양한 술이 있는 메뉴판,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반고흐' 그래픽 노블(나도 있는)과 '장줄리앙 도록'이 내가 예약한 테이블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니겠는가.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필 조명이 좀 어두웠는데 사장님이 이동형 스탠드를 추가로 주셨다. 세심하시다.


‘칼바도스’와 ‘압생트 마티니’를 마셨다. 두 술을 공부하면서 또 세계관이 넓어졌다. ‘칼바도스’는 사과 브랜디인데, 사과나 배로 만든 과실주를 증류주로 만든 것이 ‘칼바도스’라고 한다. 목양인에 딱인 술이었다. 또, 압생트 마티니에 들어가는 ‘베르가못’은 귤과였다. 어쩐지 베르가못이 좋더라. 향기로만 알던 이름이었는데 허브가 아니라 귤과의 과실이었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압생트는 말린 쑥으로 만든 술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허브향들이 강해서 예거마이스터의 느낌이 났다. 훨씬 알코올 도수가 강하고 상큼했지만. 차갑게 냉동고에 넣어놓은 잔에 나왔다.


일정을 덜어내니 성찰할 시간이 생겼다. 글을 쓰고 독서를 할 시간이 확보되었다. 운동을 하루 거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새로운 경험, 이벤트는 하루에 하나만 넣자. 비워야 채워진다. 그럼에도 100을 계획하고 30 이상을 해내며 살아가는 내가 나는 좋다.


이러면서 내일은 소설 쓰기 수업 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궁리 중이다. 수업이 홍대에서 7시 반이니까… 오전에 헬스를 할 수 있고, 수강생들이 쓴 소설을 읽고 또 내 글을 쓰는 시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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