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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Jun 28. 2019

연필이는 나를 잊었나

회사원 수첩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두 번째 회사에서 야근하던 중 동료가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겠다, 가 아닌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서. 정기적으로 한 번씩 일이 휘몰아칠 때면 야근을 아주 늦게까지 했다. 그래서 퇴근 후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짧아 마치 집에 잠시 다녀오는 것 같았다. 나는 집과 회사의 거리도 가까운 편은 아니어서 집에 도착해 머무는 시간은 더 짧았다.

 

머리 바싹 말리고 잘 걸


새벽에 집에 들어간 나는 자고 있는 가족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들어가 조심조심 씻고 덜 말린 머리를 베개에 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조용히 한다고 했지만 열 번 중 여덟 번은 잠에서 깬 엄마나 아빠가 나를 안쓰럽게 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드라이기 소리도 시끄러울 까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않았던 게 조금은 후회가 됐다.

 기간 동안 집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야기를 듣는 것도,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도 버거웠다. 힘을 조금만 더 냈다면 가능했을 텐데, 그때는 너무 힘들어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도 핑계겠지.


미안함을 지우는 방법


마음 한 구석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지쳐 있었지만 미안했다. 새벽에 들어왔다 아침에 나가서 별로 말 한마디 할 기회가 없는 게 미안했다. 특히 집에 둘이 오랜 시간 있을 엄마와 연필이에게.

그렇게 며칠을 일하고 나면 비교적 여유로운 시기가 왔다. 바쁜 시간 동안의 미안함을 지우고 싶어 나는 종종 손에 뭔가를 들고 퇴근했다. 세일을 한다는 spa 브랜드에서 연필이의 옷을 사서 가기도 했다. 오랜만에 일찍 끝난 날에는 회사 근처 유명한 일식집에서 초밥을 사서 갔고, 밤늦게까지 하는 유명한 족발집에서 족발 대자를 사 들고 무거워 저린 손을 털며 집에 간 적도 있다. 외근을 갔다가 그 동네에서만 파는 빵이나 케이크를 사서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조심조심, 그걸 가지고 퇴근하기도 했다.(이런 것들은 퇴근 전까지 잘 보관해야 했는데, 누군가가 내 자리를 지나가다가 보고 먹어버리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소비 자체를 하지 않아서, 뭘 사는 일이 꽤나 신경이 쓰이고 어려운 일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고, 돈도 써 본 사람이 잘 쓰나 보다.  

 

서운함을 잊기


그렇게 뭔가를 가지고 집에 가면 나를 반갑게 맞아줄 법도 한데, 연필이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손에 들린 건 관심이 있고 좋아했지만 나를 반겨주진 않았다. 부모님은 오랜만에 나와 이야기하는 걸(야근할 때 거의 얼굴만 잠깐 보고 내가 다시 나갔기 때문에) 반가워했지만 연필이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은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몇 년도 아니고, 몇 달도 아니고, 고작 1주일 정도, 그것도 집을 아예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루에 잠깐은 얼굴을 봤으면서 이럴 수 있나. 서운한 마음이 안 생길 수 없었다.


그렇게 바쁜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연필이와 데면데면한 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연필이는 다시 예전처럼 친근감을 표시했다. 서운했지만 몇 번의 그런 시간을 보냈다. 몇 번 연필이의 외면을 겪다 보니 드는 생각이 연필이가 나를 어색해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나쁜 마음이 아니라 며칠 만에 봐서 어색한 걸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왜 오랜만에 왔어?라는 식의 토라진 마음은 아닐까. 내가 이해하기에 연필이의 마음은 너무도 어려웠다. 이렇게라도 생각하는 수밖에. 이럴 때마다 너무 자주 상처 받을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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