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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Oct 11. 2019

내 서랍에는 동생이 입던 티셔츠가 가득 들었다

너의 취향


찬바람이 분다. 베란다 구석에 상자에 넣어둔 긴 팔 옷을 꺼낼 때가 되었다. 여름옷은 두어 벌만 남기고 모두 긴 팔 옷을 꺼낸 상자에 넣어야 한다. 귀찮은 마음에 아직 좀 더 반팔을 입을지 몰라, 라며 정리를 미루고 싶어 진다. 서랍장 제일 윗 서랍은 내 반팔 티만 한 가득이다. 낡거나 늘어나 못 입게 된 것을 정리할까 싶어 봐도 모두 짱짱하다. 그대로 모두 상자에 들어가겠군.

언젠가 “수첩이는 반팔 티 모으나 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내가 매번 새로운 반팔 티셔츠를 입은 걸 보고 말한 거였다. 특히 여름옷 중에 반팔 티셔츠가 유난히 많다. 그러나 그중 내가 산 것은 몇 개 없다. 거의 다 연필이가 입던 것들이다. 연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엄마에게 옷 수거함에 넣으라며 준다. 엄마는 연필이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옷을 치워둔다. 그렇게 연필이가 몇 번 입고 나서 (또는 아예 입지 않고) 입으려 하지 않았던 티셔츠들을 내가 한 장 두 장 가져오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다.


 똑같은 옷인데 더 좋아하는 옷이 있네


 연필이는 무척 까다롭다. 까다로운 것도 어떤 기준으로 까다로운 건지 내가 알지 못할 때도 많다. 그것은 타고난 취향일 수도 있지만, 자신만의 법칙을 만들고 그걸 지키려는 장애의 특성이기도 하다.

연필이는 과자의 상표뿐 아니라 그 과자에 든 방습제나 디테일한 포장디자인 변경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연필이가 좋아하는 과자가 리뉴얼한 포장으로 나와있으면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조금 두근두근하기도 했다.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연필이는 엄마가 동그랑땡을 부쳐 채반에 놓을 때도 자신이 좋아하는 모양의 동그랑땡만 골라서 먹는다. 티셔츠나 트레이닝 바지 같은 걸 똑같은 걸로 두 장 사줘도 더 좋아하는 옷이 있고 덜 좋아하는 옷이 있다. 실밥 간격이나 소매 솔기가 매끈하게 접힌 정도 같은 것이 더 보기 좋은 게 있는 게 아닐지 추측만 한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봐도 똑같은데 더 좋아하는 옷만 입으려 한다.


얼마 전 연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웨하스를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내가 연필이에게 웨하스를 사간 적도, 내가 웨하스를 즐겨 먹는 것도 아닌데. 연필이가 웨하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연필이가 내 집에 왔을 때 유일하게 있던 과자가 웨하스였던 거 같긴 한데. 나는 편의점에 뛰어갔다. 다행히 웨하스가 있었다. 혹시 몰라 두 가지 맛의 웨하스를 사 갔는데, 둘 다 연필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사 온 정렬되어 들어 있는 각진 웨하스 포장이 아닌 우리 집에 왔을 때 봤던 스낵 봉지 같은 포장에 미니 웨하스가 들었던 걸 원했던 것 같다.(하지만 집 앞 편의점에는 팔지 않았다) 연필이는 내가 사 온 웨하스 두 개를 내 가방에 넣어줬다. 나는 집에 와서 그걸 먹으면서 ‘멍충이, 이거 엄청 맛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날 줬네.’라고 생각했다. 집 앞 마트에 가면 연필이가 좋아하는 포장의 웨하스를 팔려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웨하스를 다 먹어버렸다.


그만 하라 소리치고 싶은 못된 마음


이렇게 연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유를 고민하고, 기다려주고, 맞춰주려 노력하는 일을 부모님보다 잘할 사람이 있을까. 부모님이 안 계시면 연필이를 이렇게 살뜰하게 살펴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너의 장애라는 것을 알지만, 가끔 “이제 그만해, 아빠 엄마가 너에게 맞춰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 말이야”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다. 연필이와 헤어지고 돌아서면 그렇게 내뱉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던 못돼먹은 생각을 했던 걸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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