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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Aug 30. 2019

쿨 하게 상냥한 사람들

연필과 수첩의 명절(2)

지난 회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명절을 싫어했다. 하지만 꼬박꼬박 조부모님 댁을 가야 했다.

https://brunch.co.kr/@muistikirja/30


그러다 고3 때 수험생임을 핑계로 가지 않기로 했다. 이후로 간간히 명절에 안 가는 때도 생겼다. 조금씩 일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명절에 집에 남아있을 때 바뀌지 않는 것은 연필이 와 함께라는 거였다.

나와 연필이집에 남기로 결정된 명절 전날 아침 일찍 부모님만 조부모님 댁으로 출발한다. 나와 연필이나 하루를 잘 보내고 있다 보면 명절 전날 밤늦게 엄마만 먼저 돌아오거나 다음날 일찍 부모님이 같이 오거나 했다.

부모님은 걱정을 많이 했다. 전화도 자주 했다. 조부모님 댁에서 각자의 공간에 있느라 서로 마주치거나 말할 틈이 없는 건지 아빠가 전화한 몇 분 뒤 엄마가 잘 있냐고 전화를 하기도 했다. 본인들과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불안했겠지만 연필이나는 조부모님 댁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지다. 고작 만 하루 정도만 함께 지내면 되는데도 엄마는 연필이와 내가 먹을 음식을 냉장고 가득 만들어 채웠다. 간식거리도 잔뜩 만들거나 사다 놓았다. 억지로 입맛에 안 맞는 음식을 먹거나 배고픔을 참고 식사 때까지 연필이 와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집 다른 어느 곳 보다 편하고 안전했다. 작은 방에 들어가 있으면서 누가 오는지 신경 쓰는 것도, 차례 지낼 때 차에 들어가는 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더 자랐기 때문에 연필이를 보기에 더 쉬웠다. 연필이도 어렸을 때보다 의사소통이 잘 되었고 좀 더 의젓해졌다. 연필이도 처음에는 자다가 일어났을 때 부모님이 없으면 좀 당황해했지만, 곧 적응했다. 연필이에게도 여러 면에서 훨씬 편하고 좋았을 거다.


버스 창문을 닫아야 하는 연필이


그렇게 부모님이 떠나고 난 날은 연필이와 외출을 했다. 명절 전 날 문을 여는 음식점이 별로 없어서 점심 일찍 먹고 나 때가 많았다. 그러다 집에서 멀지 않은 설렁탕집이 쉬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필이는 여전히 설렁탕을 좋아한다.

https://brunch.co.kr/@muistikirja/5

집 에서든 설렁탕집 에서든 점심을 먹고 나면 버스를 탔다. 명절 전 날 낮 버스는 꽤 한가했다. 연필이가 버스를 타면 꼭 하는 일이 있는데 바로 열려 있는 창문을 닫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니면 연필이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두는 게 연필이에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추운 설 무렵에는 창문을 여는 일이 없어서 연필이가 불안해하며 창문을 닫으려 할 필요가 없었다. 주로 추석 전날 버스를 타면 창문이 열려 있었다. 빈자리에 열려 있는 창문을 닫는 건 별로 문제가 안 됐다. 버스에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주로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은 빈자리 옆이었다. 아주 가끔 곤란한 상황이 생겼는데, 누군가가 앉아 있는 자리에 열려 있는 창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게다가 냉방이 되지 않는 버스에 타서 더위를 느끼는 사람이 자리에 앉으면서 활짝, 창문을 열 때는 더욱 곤란했다. 앉아 있는 자리에서 먼 자리의 창문이 열린 경우 연필이를 달래다가 손을 꼭 붙잡고 못 가게 하거나, 그도 안되면 중간에 내렸다. 딱 한 번, 연필이와 내 바로 앞자리에 어떤 사람이 털썩 앉으면서 창문을 아주 활짝 열었는데, 연필이는 쏜살같이 팔을 뻗어 그 창을 ‘탁’ 소리를 내며 닫아버렸다. 앞자리 사람은 화낼 새도 없이 순식간에 큰 소리를 내며 창이 닫힌 걸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여러 번 사과하면서 연필이가 장애인이며 창을 닫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땀도 많이 났고 얼굴이 붉을 정도로 더워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저런 애를 왜 데리고 나왔냐고 화를 내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다. 더 피해 주지 말고 얼른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조금만 참으시면 연필이와 나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릴 거라고 했다. 그 사람은 아,라고 하더니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아요,라고 짧게 말했다. 조용했던 버스라 이야기를 들었던 건지 버스 기사가 에어컨을 켰다. 어차피 승객은 그 사람과 우리 밖에 없었으니까, 따로 양해를 구해야 하는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 무심한 듯 상냥한 사람들.


과하게 친절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쇼핑몰로 갔다. 쇼핑몰도 구경하고, 백화점 식품관 계산대에서 좋아하는 걸 사겠다고 다시 사람들을 비집고 뛰어가려고 하다가(사려고 집어 들면 아주 여러 개를 집어 들어 매우 곤란 해진다) 못 하게 하자 계산대 앞에서 드러눕기도 했다. 나는 계산하는 점원과 뒤에 줄을 서 있던 사람에게 여러 번 사과를 했고, 연필이의 장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계산하시라고 드러누운 연필이를 일으켜 조금 뒤로 갔다. 꼬맹이도 아닌 다 큰 연필이가 바닥에 누우며 졸라 대는 걸 보고 좀 많이 놀란 듯 눈이 커졌던 그 사람은 그저 양보를 받은 것에 대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계산을 하고 갔다. 나는 연필이를 진정시키고 점원에게 사과했지만 그냥 상냥하게 아닙니다,라고 하고 우리가 산 것들을 계산해줬다. 두 사람 다 당황한 것 같은데 별일 아닌 듯 행동해주니 고마웠다. 화를 내지 않은 것도 고맙지만 오히려 “뭐 때문에 그럴까?” 라며 아이를 어르듯이 친절한 말을 하거나 너무 상냥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고마웠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연필이는 지쳤는지 낮잠을 조금 잤고 그동안 나는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저녁을 먹고 연필이를 씻기고 나도 씻고 잘 준비를 하면 엄마가 왔다. 쿨 하게 상냥한 사람들 덕분에 명절이 조금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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