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전날 먹은 밥상을 그리고 앞에 나가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활동의 목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식당에 가서 가족과 밥 먹은 걸 그렸다. 선생님께서는 "수첩이네 좋은 일 있었구나"라고 했다. 아마도 가족 생일, 승진, 합격 같은 일이 있겠구나 싶었나 보다. 나는 "아뇨. 그냥 갔는데요"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수첩이네는 외식을 잘하나 보네"라고 했다.
요즈음은 외식이 일상이다. 식당도 무척 많고 메뉴도 가격대도 다양하다. 어디 가면 뭐가 맛있는지 찾아보기도 쉽다. 30년 전만 해도 가정에서 외식은 그렇게 자주 하지 않았다. 아, 아닌가. 여하튼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그랬다. 내 친구들은 외식이라 하면 생일이나 좋은 날 무슨무슨 회관, 어디 어디 가든 같은 곳에서 고기를 먹는 것을 주로 떠올렸다.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 한 끼, 많으면 두 끼 정도를 외식했다. 요새 기준으로는 그렇게 자주 했던 건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비교적 자주였을 뿐.
기절할 정도로 쉴 틈 없는 엄마
내가 직접 끼니를 챙겨 먹는 지금 새삼 생각해보니, 그때 엄마는 주중에 너무 열심히 우리에게 먹을 걸 해 줬다. 연필이가 좋아할 만한 반찬을 만들고, 나와 아빠가 좋아할 만한 것을 또 만들었다. 국이나 찌개 1개, 나물 종류 몇 가지, 고기나 생선 종류 1가지 이상, 밑반찬 몇 가지. 거기에 간식도 중간에 만들었다. 나는 잔병치레를 종종 했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싶어 집을 항상 깨끗하게 쓸고 닦고 털었다. 그러면서도 종알거리는 걸 좋아하는 내 말도 들어줘야 했고, 일상적인 집안일도 계속해야 했다. 나도 어린아이였으니 손이 갔다. 연필이를 24시간 돌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거의 기절할 정도로 쉴 틈이 없는 삶이었다.
아빠는 직장에 다녔기 때문에 주중에는 음식을 하고 식사를 차리기 힘들었다. 이따금 주말 아침, 아빠가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탕찌개와 감자밥을 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주말에 아빠도 지쳐있었다. 그래서 아빠는 주말에 "이거 먹으러 갈까?"라는 말을 했다. 외식을 했던 건 엄마가 조금이라도 편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집에서 밥을 하지 않으면 외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달음식은 중국집, 치킨 정도였고(물론, 이것들도 시켜먹음), 마트에서 반 조리식품을 살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외식메뉴 변천사
아주 어렸을 적 연필이는 잘 먹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로 연필이가 먹는 메뉴를 먹었다. 초창기 자주 갔던 곳은 동네 설렁탕집. 아주 허름한 집이었는데 주 고객층은 아저씨들. 가족단위로 오는 손님은 거의 우리 밖에 없었다. 설렁탕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연필이가 잘 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자주 갔다. 맛이 좋았던 반면에 깨끗하지 못했던 집이다. 설렁탕을 먹다가 아래에 까만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아 내려다봤다. 까만 눈을 굴리며 아주 큰 쥐가 있었다. 책이나 TV에서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검은색이어서 잠시 '내가 모르는 종류의 이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인가'라고 생각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쥐는 내 발 끝(키가 작아서 의자에서 발이 떠 있었다)을 스치듯 건드리며 빠르게 도망갔다. 아직도 발 끝을 스치던 느낌이 생생하다.
연필이는 친척들과 함께 대부도에 가서 인생 첫 매운탕을 먹었다. 우리는 조그만 연필이가 빨간색 국물을 맛있게 먹는 것을 신기해했다. 나는 조금 신나기도 했다. 연필이가 먹을 수 있는 게 늘어났으니까. 연필이는 해마다 먹는 가짓수를 늘렸다. 우리 가족도 외식 메뉴가 점점 늘어났다. 갈비 등 굽는 고기, 쌈밥, 생선구이부터 한정식, 닭 종류, 탕 종류, 여러 가지 찌개들까지. 끝판왕처럼 여겼던 것은 회였다. 나는 어렸을 적 회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연필이가 먹지 않으니 횟집은 아주 가끔 갔다. 연필이는 거기서 튀김 종류로 요기하다가 서더리로 끓인 매운탕과 밥을 먹었다. 맛있게 먹고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식사였다. 누구나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 건데. 나 때문에 쟤는 저것밖에 못 먹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는 "연필이만 입이냐?"며 내가 잘 먹었으니 됐다고 했다. 10년 정도 전부터는 연필이도 회를 먹게 됐다. 썩 좋아하진 않지만 한두 점 거부하지 않고 먹게 됐다.
참고로 현재 연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외식 메뉴는 파스타와 피자다. 쾌적하고 조명도 은은하며 깔끔한, 분위기 좋은 곳에서 먹는 걸 좋아한다. 아직도 설렁탕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게 분위기는 예전 설렁탕집과는 정 반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