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양쪽 할머니를 (친) 할머니와 외할머니라고 부른다. 엄마의 엄마를 나는 외할머니라 잘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왠지 죄송했고, 의리 없는 말 같아서다. 내가 평소에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빠의 고향에 계신 할머니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외'라는 것도 왠지 뭔가 맘에 안 드는 군 글자가 하나 붙어 있는 것 같아 싫었다.
할머니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 집 근처에 사셨다. 처음에는 엄마의 고향인 다른 도시에 살던 할머니는 직장 생활하는 막내 외삼촌(사실 그냥 외삼촌이라 부르면 서운할, 따로 부르는 호칭이 있지만)을 챙겨주시러 집을 합치셨다. 그러다 엄마가 연필이와 함께 집을 비울 일이 늘어나고, 아직 어린 나를 보살펴주시고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셨다.
할머니와 외삼촌은 순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여서 그곳으로 이사를 왔다. 아마도 외삼촌은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교통이 좋지 않았고, 직장과도 멀었으며, 복잡하기까지 한 오래된 동네였으니까. 오래 살았다면 정이라도 들었을 텐데 그게 아니었으니.
할머니네로 등교하기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번갈아 등교 시간이 달랐다. 당시 교실수가 부족해 한 교실을 두 개의 학급이 쓰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1학년 1반과 2학년 1반이 한 교실을 쓰고 한 번은 1학년 1반이 오전에 등교하고 2학년 1반은 점심식사 후에 등교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2학년 1반이 오전에 등교하고, 1학년 1반은 오후에 등교한다.
내가 오전반일 때는 학교에 있는 동안 엄마가 연필이와 조기 교실을 다녀오므로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후반일 때, 오전에 보살핌을 받다가 점심을 먹고 학교를 가야 했다. 아마 첫 오후반일 때는 엄마가 챙겨준 반찬을 꺼내 먹고 학교에 갔던 것 같다.
그러다 할머니네가 우리 동네로 이사오자 아빠가 출근하고, 엄마와 연필이가 나올 때 나도 함께 책가방을 챙겨서 할머니네로 갔다.
내가 가면 할머니는 대부분 책을 읽고 계셨다. 그러다 분주해지셨다. 가장 크게 분주해지시는 이유는 내 밥을 챙겨주시려 하기 때문이었다. 맛있게 먹었던 것들은 소박한 것들이었다. 케첩 대신 참기름과 깨를 솔솔 뿌린 간장에 찍어 먹는 계란 프라이와 푹 익은 감자가 들은 구수한 북엇국은 할머니네서 처음 맛본 것들이다. 고추장으로 볶은 멸치볶음도 좋았다. 붉은색 국물에 소고기와 무 같은 것이 잔뜩 들어간 국도 한 자리에서 여러 번 대접을 비울 정도로 맛있었다. 어느 날은 뭔가에 계란 물을 발라 곱게 부친 전을 하셨다. 재료를 일부러 구해 오신 것 같았다. 전이 완성된 시간은 오후였고, 곧 엄마가 왔다. 이것은 엄마를 위한 것이었다. 간(肝) 전 이었다. 부드럽고 고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