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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May 02. 2019

외할머니 아니고 그냥 할머니(2)

수첩과 연필의 어린 시절(3)-2

할머니 댁은 학교랑 가까웠는데, 내가 거기서 나오거나 그리로 들어가는 걸 본 아이들, 혹은 거기서 나와 논 아이들은 거기가 우리 집인 줄 알았다. 내가 없을 때 놀자며 할머니 댁으로 찾아온 애들도 있었다. 이사 시기가 맞지 않아 1달 정도 거기서 산 적도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가 볼 일을 보러 갈 때-운전면허를 딸 때도 연필이와 나를 보살펴 주신 건 할머니다. 


너, 참 가엽구나


한 번은 할머니네까지 쫓아와 나를 괴롭히던 아이가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아이와 조용히 몇 마디 나누시고는 천 원짜리 몇 장을 내게 주셨다. 그 아이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오라면서. 아이스크림 몇 개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덕분에 지나가던 친구 몇 명도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돌아와 할머니께 물어봤다. 

"가엽다 생각해라. 너 참 가엽구나."

나는 괴롭힘 당하는 내가 더 가엽다면서 화를 냈고, 할머니는 남을 괴롭히는 게 나쁜 행동인지 잘 모르는 것 같던 그 아이가 가엽다는 거라고 하셨다. 나에게 나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그냥 "너 참 가엽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라고 하셨다. 이후로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만나면 이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너 참 가엽다. 너 참 가엽구나.


비가 엄청 오던 날 할머니가 학교 끝날 때 오셨던 적이 있다. 나는 우산이 있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오자 할머니가 걱정돼 오셨다. 할머니는 우산 하나만 들고 계셨다. 집을 나오자마자 나만한 아이가 비를 맞고 가길래 들고 있던 우산을 줬다고. 할머니는 "여기가 우리 집이니까 내일 학교 올 때 주고 가면 된다"라고 여러 번 말했으니 우산을 가져오겠지 라고 하셨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우산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할머니 것으로 추정되는 우산을 들고 가는 아이를 발견했다. 들어가는 교실을 확인하고 할머니한테 얘기를 했는데, 할머니는 똑같은 다른 우산일 수도 있으니 그 아이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설사 그 우산이 맞더라도 스스로 돌려줄 생각이 없는 거니까, 그냥 우산 하나 돌려줄 줄 모르는 가여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자 했다.


월급날마다 할머니께 책 사 드려야지


할머니는 책 읽는 걸 좋아하셨는데, 특히 소설책을 엄청 좋아하셨다. 나를 봐주실 때도 틈틈이 돋보기를 쓰시고 엎드려서 책을 읽으셨다. 큰 외삼촌 젊은 시절, 나중에 할머니와 서점 하는 걸 꿈꿨다고 할 정도로(큰 외삼촌도 책을 좋아하신다) 할머니는 책을 좋아하셨다. 그런데 책을 사진 않으시고 거의 빌려 읽으셨다. 소설책 말고도 활자로 된 것은 다 좋아하셨는데, 내 어린이용 책도 빌려 읽으셨다. 우리 집에 있는 별 재미없는 책들도 빌려 읽으시곤 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사무소(현 동주민센터)에서 책을 무료로 빌려주는 걸 알게 됐는데, 이걸 할머니께도 알려드렸다. 할머니는 무척 좋아하셨다. 당시는 오후반으로 학교 가는 일이 없어져 할머니네에 매일 가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주 우연히 동사무소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아마 할머니와 나 둘 다 자주 거길 가다 보니 마주쳤겠지. 한 번에 세 권인가 네 권 정도밖에 대출이 안 돼서 할머니도 나도 금세 읽고 반납하고 또 빌리고 했던 것 같다. 

90년대 후반쯤,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을 비롯해 여러 책을 대여하는 도서대여점이 생겼다. 나는 할머니에게 이것도 알려드렸고, 할머니는 정액을 끊고 책을 빌려 보셨다. 신간이 많아 좋다 하셨는데, 아무래도 동사무소가 무료였던데 반해 돈을 지불하는 곳이어서 마음 놓고 빌려보진 못하셨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돈 벌면 할 일 몇 가지 중 하나가 월급날마다 할머니한테 책을 사서 드리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생 때 할머니는 지방으로 내려가셨는데, 딱 한 번 소설책 몇 권을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해 할머니께 보내드렸다. 그리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지나고 보니 내가 취직해 첫 월급을 받기까지 1년도 안 남은 때였다. 


보리쌀 서 말이 없어 처가 옆에 사냐고?


어렸을 때는 항상 우리 가족에 할머니도 포함됐다.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만들 때도 선생님이 그만 하라고 하지만 않는다면, 즉 시간이 모자라지 않다면 세 개를 만들었다. 연필이는 할머니네 가면 항상 앉는 자리가 있었고, 좋아하는 할머니네 유리컵이 있었다. 아빠는 외식할 때 할머니를 모시고 가자고 했다. 김장도 함께 했다. 여행도 함께 다녔다. 할머니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가 할머니께 하는 것은 보잘것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던 때는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할 때였다. 처가살이는 아니지만 한 동네에 가까이 산다고 하면 일단 아빠도 작아지고 엄마도 작아졌다. 두 분이 스스로 작아졌던 건 아니고 남의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엄마 아빠에게 귓밥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을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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