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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May 03. 2019

아빠가 자상하다고?

수첩과 연필의 어린 시절(4)

내 연배의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드디어 전기밥솥으로 밥을 했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밥을 차린 적도, 라면을 끓여본 적도 없다고 했다. 나의 아빠와 동갑이었다. 대화에 끼지 않고 잠자코 있던 내게 나의 아빠는 안 그러냐고 묻는다. 응, 안 그래. 하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뭔가 오해를 하겠지. 재수 없다고 하거나.

"우리 집은 좀 특수한 상황이니까, 나 어렸을 때부터 많이 하셨."

그 말에 다른 둘은 고개를 끄덕이다 "참 자상하시네"라고 말했다. "우리 시절에 아버지가 부엌에 잘 안 들어갔잖아"라는 말과 함께. 재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오해한 것 같긴 하다.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렸을 적부터 아빠가 자상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아빠가 집에서 뭔가를 하는 걸 보거나 듣거나, 나와 연필이에게 뭔가를 해 주거나 같이 노는 걸 본 사람들이 하던 말이었다. 내 또래 친구들의 아버지들과 비교해보면 아빠가 했던 집안일 양이 많긴 했다. 마늘 까기 같은 품이 많이 드는 일, 세심하지 않지만 힘껏 닦아내는 청소, 밥 먹고 난 설거지, 간단한 음식 만들기, 생필품 사기, 과일 깎아주기 등. 그밖에 내가 커서까지도 가끔 내 밥을 차려줬고(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주셨다) 혼자 밥을 안 먹는 연필이 밥 먹여주기, 연필이 씻기기 같은 일도 시간이 날 때 했다. 아, 아빠는 우리들 머리는 잘 못 묶었다.

연필이와 산책이나 운동 하기, 연필이 병원 갈 때 엄마와 같이 가기 등. 아빠는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해서 틈나면 어린 나와 연필이를 데리고 공원이라도 가 놀았다. 사실 나는 좀 귀찮았다.

아빠가 이런 일을 했던 이유는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엄마가 기절할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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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기


물론 이런 상황에서 엄마는 매일 바뀌는 아침밥과 매일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 깃이 잘 선 바지를 아빠에게 줬다. 엄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아빠에게 최선을 다 했다. 아빠도 그랬다. 두 분 다 최선을 다 했다.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상 했다기보다, 두 분 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 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아빠는 바지런해서 틈 날 때마다 집안일을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섬세하고 나긋나긋한 '자상함'과는 거리가 있는 성격이다. 조급할 때도, 꼼꼼하지 못할 때도 있다.


나의 아빠가 집안 일과 나와 연필이를 돌본 것은 글 앞부분에서 말한 두 사람의 아버지들이 스스로 밥을 차려먹을 필요가 없어서 밥을 차릴 줄 모른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게 아닐까. 밥을 차려먹을 필요가 없던 상황과, 밥을 차려먹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던 상황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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