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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Jun 05. 2020

“에구, 어린데 벌써 어떡해”

심각한 표정의 친구 어머니와 비염



+어린 시절 이야기 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 집에 가서 숙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숙제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는 게 거의 대부분일 거고 숙제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을 조금 남겨두고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같이 왔던 몇 명과 집으로 오라고 한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집에 들러 책가방을 내려놓고 엄마에게 친구 집에서 숙제를 할 거라고 말하고 공책과 필통, 교과서 같은 걸 챙겨서 친구 집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친구집에 도착했는데, 재채기와 콧물이 나옵니다. 아, 휴지가 없네요. 책가방을 집에 놓고 오지 않았어도 아마 휴지는 없었을 겁니다. 그 날 학교에서 휴지를 다 털렸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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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친구에게 휴지를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거실로 나가 두리번 대더니 두루마리 휴지를 집어 손에 두세번 정도 둘둘 감아서 뜯고는 제게 건냈습니다. 감기에 걸렸냐고 묻는 친구에게 저는 비염이라고 했지요. 감기가 아니니 네게 옮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코를 조금 풀다가 진정되고 놀다보니 외출했던 친구 어머니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아마 장을 봐 오신 것 같았어요. 손에 이것저것을 들고 들어오셔서 배 고프지 않냐고, 간식 만들어 주신다고 했거든요. 저와 다른 친구들은 그 분께 인사를 했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수첩이가 비염이래”라고 말했습니다. 놀란 표정의 친구 어머니는 내게 진짜 비염이냐고 물어보셨어요.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병인가? 진짜냐고 물을 만한 병인가? 좀 이상했지만 진짜 비염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나를 안쓰럽게 보며 “에구, 어린데 벌써 어떡해” 라고 하셨어요. 비염 때문에 고생스러웠던 건 사실이고, 여러가지 불편했기도 했고, 그걸 보는 어른들이 안쓰러워 한 적도 종종 있지만. 어린데 ‘벌써’ 어떡하냐는 그 말이 좀 이상했지만, 그냥 조그만 아이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과일을 깎아서 주셨는데, 일회용 접시에 각자 먹을 만큼 덜어서 나눠주셨습니다. 보통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큰 접시에 과일을 많이 깎아서 포크 여러 개와 주시곤 했는데. 개인 위생 면에서 좋은 방법이지만, 일회용 접시는 밖에서만 써 봤던지라 어색했습니다.


결국 다시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 친구 어머니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셨던 거 같습니다. 혹은 다른 질병과 착각을 하셨으려나요. 그냥 그 친구 집은 일회용 접시에 개인이 먹을만큼 미리 분배해서 주는 집이었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아주 가끔, 일회용 접시에 놓인 과일을 볼 때면 그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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