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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 Feb 14. 2020

갑 티슈의 추억

티슈와 비염

+편의상 일반적 두루마리 화장지와 구별하기 위해 갑 티슈에 든 것과 같은 재질의 화장지를 ‘티슈’라고 칭하겠습니다.


맨 몸으로 집 앞에 잠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거나, 집 앞에 김밥을 사러 가는 게 아니라면 저는 항상 티슈를 가지고 다닙니다. 가방에 티슈가 없으면 불안합니다. 어느 날 저와 만났을 때 제가 티슈가 없다고 한다면 가지고 나온 걸 다 써버렸거나, 전날 다 써 버린 것 잊고 다시 챙겨 나오지 않았거나, 그렇게 티슈가 없는 걸 알았지만 새로 살 곳이 없었거나 살 시간이 없어서일 겁니다.


이런 습관은 비염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염이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이런 습관이 생긴 건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티슈를 챙겨 다니게 된 사연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엄마는 제가 비염이 생기고 나서 항상 집에 갑 티슈를 채워 두셨습니다. 코를 자주 풀다 보면 콧구멍 둘레와 코 밑 피부가 빨갛게 되고 심하면 살짝 벗겨지기까지 합니다. 어릴 때는 피부가 약하니 더 심했겠지요. 그래서 엄마는 좀 더 부드러운 휴지로 콧물을 닦으라고 갑 티슈를 떨어지지 않게 집에 채워 두셨습니다.

어린 시절, 당시만 해도 다른 친구 집에 가면 갑 티슈가 없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있어도 친구 어머니 화장대에 레이스나 그 비슷한 헝겊으로된 케이스에 덧씌워져서 있었고, 친구 방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휴지는 그냥 뭔가를 닦아내는 데 필요한 거였고, 그게 꼭 부드러울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요. 갑 티슈가 쓸 수 있는 양에 비해 가격이 더 비싸기도 했고요.

당시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기 초나 중간중간에 휴지를 가져오라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두루마리 휴지 한 롤 씩만 챙겨 와도, 여러 명이 가져오면 꽤 오래 쓸 수 있습니다. 가끔 갑 티슈를 가져오라고 할 때도 있었는데, 이건 두루마리 휴지보다 좀 적은 인원에게 할당됐습니다. 그럴 때 저는 처음 몇 번은 자진해서 가져오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두루마리 휴지보다 조금 더 비싸기는 했지만 우리 집에는 갑 티슈가 거의 항상 있었으니까요. 다른 친구들은 학교에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갑 티슈를 사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엄마는 그런 제게 여러 개를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딸인 제가 갑 티슈를 많이 쓸 테니 다른 친구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좀 더 내는 게 좋겠다 싶으셨던 것 같아요. 몸집이 조그만 저는 가져가기 힘들다며 한 개 또는 두 개만 가져 갔습니다.

그런데 엄마 생각은 틀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교실에 제출한 휴지를 열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생활 통틀어서요.


왜 티슈를 빠른 속도로 써 버릴까


이게 ‘휴지 미스터리’라고 어렸던 제가 이름 붙인 것인데. 이상하게도 갑 티슈가 생기면 갑 티슈 없이 잘 생활하던 아이들이 열심히 이 티슈를 뽑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몇 방울 책상에 흘린 걸 닦는데도 티슈 여러 장을 뽑아 썼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젖은 손을 티슈 여러 개를 뽑아 닦았고요. 여러 장을 뽑아 자기 주머니에 넣어 놓고 쓰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톡톡, 한 장씩 뽑혀 나오니 두루마리 휴지보다 사용하기도 더 편했겠죠. 보통 갑 티슈는 창가 창 틀이나, 교실 앞 쪽에 뒀는데, 거의 항상 제 자리에서 멀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 중에는 쓸 수 없고, 쉬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의 자리를 비집고 갑 티슈에게 가면 이미 거의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콧물을 닦기 위한 휴지를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의아하게 묻습니다. 며칠 전에 갑 티슈(실제로는 특정 상표명을 말씀하심) 가져갔잖아? 제가 그건 다 없어졌다고 하자 벌써 제가 그걸 다 썼냐고 물으셨습니다. 엄마 딸이 다 쓴 거 아닌데. 그럼 갑 티슈 더 가져갈래? 아니, 아니, 안 가져갈래. 저는 티슈를 집에서 챙겨서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갑 티슈에서 티슈 10 장씩 뽑아 곱게 차곡차곡 접어서 전용 주머니(제가 만들었어요)에 접어 넣고 학교에 갔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휴대용 티슈도 대부분 갑 티슈와 같은 보드라운 재질이고, 좀 더 부드러운 재질의(매수가 적긴 하지만) 휴대용 티슈가 나오지만, 제가 어렸을 때 휴대용으로 나오는 티슈들은 갑에 든 것보다 대부분 거칠었습니다. 휴대용 티슈를 사면 거의 항상 조심스레 뜯어 얼마나 부드러운지 손으로 만져봤던 거 같아요. 제가 살던 동네에서만 부드러운 휴대용 티슈를 팔지 않았던 걸까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갑 티슈가 빨리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티슈를 많이 가지고 가면 아이들이 제 티슈를 다 써 버렸거든요. 결국 콧물을 닦을 길 없는 어린 수첩이는 거친 두루마리 휴지로 코를 조심이 닦아야 했습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없으면… 옆 반에 가서 빌린 적도 있지요.


그런데 그 마저도 탐내는 아이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자신이 감기에 걸려서 필요하니 계속 휴지를 달라고 하거나(나도 필요한데) 자신이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와서 땀이 나니 휴지를 달라고 하는 등(세수를 하는 건 어떨까)의 이유에서였습니다. 뭐, 필요할 수 있겠죠. 나눠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맡겨 놓은 것처럼 내놓으라는 태도이니.


어릴 적 갑 티슈에 얽힌 일들을 떠올릴 때면, (제가 개념을 완벽히 알지 못하지만)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생각납니다. 만인은 아니고 몇몇 아이들과의 일이었지만. 아무튼 저는 그들과 투쟁을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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