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웨이를 하며-
20대 후반의 어느 날. 선배와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던 중, 선배가 나에게 건넨 질문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렇다고 그 질문이 이상한 질문이거나 엄청 특이한 질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단순하고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넌 어떤 사람이니?”
3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놓고도, 넌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받아본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뭇거리다 내뱉은 내 대답은 이랬다.
“선배, 나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그리고 네가 알아야지! 네가 누구인지.”
그 날 이후로도 나는 한참을 외면했었다. 그 질문에 대해.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10년 가까운 세월이 다시금 흘렀다.
그 중 몇 년을 나는 ‘선생’이라는 정체성으로 나름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고, 잘 따르는 아이들이 고마웠고,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과 아이들을 통해 얻는 배움들로 일상이 가득 찼다. 때때로 취미를 찾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며 나를 성장시켜왔겠지만, ‘나’에 대한 더 깊은 질문과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안정적 직장을 잡고 싶었던 당시 나의 상황은 ‘나’라는 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고민보다는 더 ‘안정적인’ 선생이 되기 위한 진로에 대한 고민이 훨씬 앞섰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이라는 것을 했고, 인생의 수순처럼 임신이라는 과제가 눈앞에 놓인 시기가 있었다. 한 번의 유산을 겪고 난 후, 나는 마치 아이를 갖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 남들에게는 쉽게 오는 아이가 나에게는 왜 쉽게 오지 않는 거냐며 대상 없는 원망도 늘어 놓기도 했다. 용하다는 한의원, 유명한 난임 병원을 들락거리며 임신을 위한 시술과 시도들을 이어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없었고, 아이를 갖는 것만이 세상 유일한 소원이었던 한 여자만 존재했다.
원하던 아이가 생겼고, 출산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엄마’가 되는 일은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처음 1년은 정말 ‘나’라는 존재 자체를 잊게 했다. 한 생명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보살피는 일만으로 24시간이 갔고, 365일이 지났다. 때로 나는 마음대로 씻을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으며, 편안히 잘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의 미소 한 번이면, 아이가 쑥쑥 자라는 모습이 보일 때면 모든 수고로움이 눈 녹듯 녹아 내렸다. 그렇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젖은 휴지에 잉크가 번지는 모양처럼. 인식하고 있는 순간이든 그렇지 않은 순간이든.
그렇게 10년을 미뤄왔던 질문에 내가 스스로 답을 찾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정말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나는 ‘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엄마’ 타이틀은 마치 내 인생의 새로고침 버튼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날, 일과 진로의 고민에 빠져있던 ‘나’도, 결혼과 임신이라는 인생의 큰 숙제를 해결하던 과정 속의 ‘나’도 사실은 ‘나’로 존재했던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고민이 묻혀있었던 것이지 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더욱이 그 모든 과정 속 ‘나’는 내 인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엄마가 되고 나서의 ‘나’는 그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묻혀있는 나조차 없음을 아니, 곧 내가 사라질 수 있음을 느끼게 했다. 내 인생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 단순한 일조차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오히려 그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시작하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진짜 고민을 시작했다. ‘나’를 위한 공부를 하고 싶어졌고, 아티스트 웨이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인생의 수순 같은 것들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용기가 생겼다. 지금이라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그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됐다.
늦은 밤, 그네에 앉아 생각했다. 내 속에 자아가 이렇게 꿈틀대고 있었구나! 표현하고 싶고, 써내고 싶고, 그려내고 싶은 자아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나에게 네가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어디 있냐고, 혹은 네가 그럴 깜냥이 되냐고, 날이 선 시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를 때면 몰라도, 알고 난 후 눈을 감을 수야 없다. ‘나’는 이제 ‘나’를 알아버렸다. 또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알릴 참이다. 내가 진짜 누구인지.
“넌 어떤 사람이니?”
서른 해를 가까이 살고도 답할 수 없었던 그 말.
아무 생각 없이 시간에 흘러
외면했던,
나를 들여다보는 일.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서는
다른 이름을 찾는 길.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평행선 달리기 같은 것.
부모도 어른도 아닌,
내 안의 어린 아이.
그 마음을 담아내는,
그네가 포물선을 그린다.
꿈을 꾼다.
이루지 못한,
꿈을. 별과 함께.
끝끝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