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의 온도에서 벗어나기까지
뜨거운 것은 불편하고 차가운 것은 두려워서, 나는 늘 샤워기 온도를 중간에 맞췄다. 그 온도가 그닥 기분 좋진 않았지만, 적당하다는 생각으로 살과의 접촉을 허락했다. 평소라면 머리를 감을 차례였지만, 몸을 훑고 내려가는 그 ‘미지근한 물’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항상 그 온도로 씻어왔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순간이었다. 급하게 물을 끈 뒤 차가운 한기가 몰려올 즈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과 닮아 있다고. 샤워를 하며 무슨 뜬금없는 생각이냐 조롱할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엔 그러한 생각이 내 뇌를 뒤덮었다. 그 온도의 물이 나의 색을 씻어내고 있다고.
“넌 좋은 사람이야, 아마 착한 애일 거야.”
공감되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에도, 난 웃어 고마움을 표했을 것이다. “뭐든 적당히 하자, 반이라도 가자”는 나의 신념 아닌 신념은 날 중간이라는 숨 막히는 공간에 가둬놓고 말았다. 더 이상 딛을 공간이 없더라도, 밀어내면 밀려나는 사람이라. 그 뒤가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나는 또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추락하겠지.
아픔 따위에 지지 않으려, 아픔보다 더 큰 행복을 찾기보다 아픔에 무뎌지는 법을 택했다. 피하는 법도 있을 터인데, 상처 위의 상처를 덮는 어리석음이 곧 나였다. 누군가의 가시 돋친 말이 — 그것이 악의가 담긴 말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줄은 알면서도 — 내 살갗을 후벼 파더라도 큰 반응이 없는 것이 내 대응 방식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귀갓길에서 후회하는 일이 있더라도, 난 그게 최선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게 그닥 잘못된 것이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그 말이 이제서야 내게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시도가 없으면 상처 또한 없었다. 새로움 따윈 없었지만 거기서 오는 약간의 편안함이 있었다. 그 편안이 가슴 뛰는 설렘을 지워버린 것일지도. 향기가 없는 꽃을 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색이 없는 그림이 완성된 그림이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쓰는 글 따위에 감상에 젖어들 사람이 있을까.
1년 같이 느껴진 10초가량의 시간이 흘렀나. 샤워기 헤드에서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즈음, 나는 샤워기 수전을 부서져라 돌렸다. 내가 가본 적 없는 차가움의 극단으로.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온도는 순식간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을 정도로 그 물은 차디찼다. 참았던 숨을 터뜨리자, 내뱉지 않은 고성을 지른 것처럼 내 안의 무언가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겪어보지 못한 온도가 세포 하나하나를 숨 쉬게 한다. 그러자 세포가 가진 본능이 내게 전하는 것이다.
“다신 중간으로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중간의 온도에 머물지 않는다. 그저 찬물 샤워뿐이지만, 누군가에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의 발악일지도 모른다. 개성을 잃은 인간에게 ‘살아간다’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살아가기 위해, 찬물 샤워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