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방향의 KTX

평안으로 가는 길

by 무지

역방향으로 KTX를 타면 창문 밖을 자주 바라보게 된다.
처음에는 느리니까 별 감흥이 없다.
단지 지나가는 풍경이 눈앞을 스쳐갈 뿐이다.


하지만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내가,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을 마주 보는 느낌이다.


그때는 치열함과는 거리가 먼 감정들이 찾아온다.
후회, 자조, 추억, 그리고 기억 사이의 어딘가.
나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그리움 섞인 회상도,
이상하게 모두 내겐 좋은 순간이다.


행복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정작 그 치열함이 멈춘 순간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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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오래 보다 보면
가끔은 지형지물이 사라진 풍경을 보게 된다.
그 순간엔 내가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시간의 균열 어딘가에
잠시 머무는 기분이다.


그때 나는 다시 생각한다.


아, 순간을 살아야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치열함을 택했어도
진짜 행복은 미래에 있지 않더라.
행복은 나의 역사에서 오는 것이고,
그 역사는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낸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미래의 행복이 아닌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본다.


아마도 평안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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