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사랑

사랑이 멸종해 가는 시대에 대하여

by 무지

그리스 신화에서 에로스는 사랑과 욕망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라 불린다.
철학에서는 육체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그 의미는 단순히 육체에 머물지 않는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단순한 욕망이 아닌,
선(善)과 진리(眞)를 향한 끝없는 동경이라 말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것도,
단상 위에 선 이의 눈동자에 마음이 머무는 것도,
부모가 자식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도,
내가 글을 쓰며 무언가에 닿으려 애쓰는 일도,
결국은 모두 사랑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역설이다.


그것은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한다.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는 이 역설을 정확히 보여준다.
사랑할 애, 미워할 증.
서로를 밀어낼 것 같은 감정이
한 단어 안에 공존한다.


사랑은 보이지 않다가도
어떤 존재를 통해 갑자기 뚜렷해진다.
그러나 정작 왜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사랑의 모순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을 실체 없는 감정이라 말한다.
허무맹랑한 환상, 혹은 자기기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행하는 대부분의 행동이
결국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보다 선을 택하려는 마음,
누군가의 결핍에서 연민을 느끼는 마음,
타인의 고통 앞에서 멈칫하는 양심,
그 모든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자,
우리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 있게 하는
가장 마지막 본질이다.




Image_fx (12).jpg


그런데 이제,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


어디에나 있을 것만 같던 사랑,
흔하디흔하면서도 고귀하다고 믿었던 감정은
일상 속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현관문을 나설 때,
우리는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혹여 마주치더라도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처음 보는 이가 도움이 필요해 보여도
도와야겠다는 생각보다
외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사람이 가장 해로운 존재다.”

이 문장은 이제 농담이 아니라,
하나의 정론처럼 회자된다.


동네를 돌며 노래를 부르던 과일 트럭의
달콤한 멜로디마저
이제는 불편한 소음으로 들린다.




생명은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변화가 낯설다.
그리고 그 낯선 변화가
내 안에서도 보일 때,
그게 가장 슬프다.


사랑이 멸종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담겨야 할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엔 벅찼던
그 복잡하고 뜨거운 감정들조차
이젠 무뎌져 간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던
‘형이상학적 사랑’ —
깊이 있는 사유와 감정이 교차하던 사랑은
점점 현실 속에서 퇴색되고 있다.




사랑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이해와 타협, 배려와 존중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관계의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
무겁고 귀찮다는 이유로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뒤늦게 깨닫는다.
그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지탱하던 동아줄이었다는 걸.


그렇게 우리는,
예정된 추락을 알아차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저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한다.




Image_fx (13).jpg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는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사랑이 자랄 수 있다고.


우리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사랑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모양이 달라지고, 언어가 바뀌어도
그 본질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불완전의 사랑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이전 07화역방향의 KT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