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8
최근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왜 한국의 취향은 축적되기 힘든가?’라는 제목이었는데,
하우스 노웨어 서울을 예로 들며 경험이 본질이 아니라
소비를 움직이는 장치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글이었다.
반대로 제주 오설록의 사례를 통해서는
경험이 감각에서 맥락으로 확장된 방향을 긍정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모델처럼 제시하고 있었다.
오설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데,
다만 하우스 노웨어 서울을 다녀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그곳이 ‘소비의 명품화’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여기서 말하는 명품화는 물질적 고급화라기보다
소비라는 행위 자체를 맥락으로 만드는 방식에 가깝다.
역사나 전통을 끼고 있지 않으면서도,
소비와 같은 배척되기 쉬운 방식이
맥락과 방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긍정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속에서 깊이는 여전히 힘을 가지지만
더 이상 유일한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축적된 맥락이 옳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기준을 의심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전통문화를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가까이 보아온 입장에서,
맥락을 지켜온 가치만큼이나 자본이 가지는 힘과 권위도 크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점에서 글에서 말한 오설록 역시 크게 다르게 느껴지진 않는다.
내가 하우스 노웨어 서울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이 가치를 비트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이다.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대신
자본이 깔아놓은 수평에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방식이 결국은 위를 향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쉬워 보이기 때문에 더 견제받고 비판받겠지만
그 쉬운 방식에 그만큼의 자본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어떤 기준과 방향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준이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깊이를 추구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모두가 그 깊이에 도달할 수는 없는 맹점이 있다.
맥락과 깊이는 밀도를 가지게 되고,
그 밀도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과 환경, 태도 등을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조건을 갖출 수 없기에
앞서 말한 가치들은 더 사적이고 좁아질 수밖에 없고,
어찌 보면 천박하고 얕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든 이 흐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천박함조차 명품화될 수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것 역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보가 과잉된 사회에서 무언가를 긍정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부정하는 방식은
파편화와 고립을 만들어낸다.
주류가 있어야 비주류의 가치가 생긴다.
맥락과 전통이 살아나려면 되려 휘발적이고 소비적인 문화가 전면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더 순수하고,
본질적인 힘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하우스 노웨어 서울은 흥미로웠다.
소비를 명품화하는 방식으로,
내 기준에서 천박하다고 느껴지는 것들로 서사를 만들고 있다.
나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방식이라 아주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