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둥이로 시작해 마이크로 끝난..진행중인 이야기
"오늘이 몇 일이지?"
"10일이요"
그 순간이 되면 긴장되는 감정의 끝을 느꼈다.
약 5초간의 침묵이 흐르고...
D.I.Y로 제작한 몽둥이가 교탁을 세게 치는 소리가 들렸다.
"30번!"
올것이 왔구나....
뚜벅뚜벅 걸어나가 부러진 분필을 하나 집어들고 수학 연습문제를 풀어나간다.
내가 돌아서는 순간 우렁찬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린다.
"설명!"
나는 분명 답을 맞췄고, 아는 문제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치로!"
결국 교탁 옆 매맞는 자리에 서서 손바닥을 다섯대 맞고 감각이 없어진 손을 주워담아 자리로 돌아갔다.
중학교 1학년 수학시간의 풍경이다.
최복수 선생님.
성함부터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아동학대의 시간이 가장 큰 원인질환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때
화장실을 너무 가고 싶은데 손을 들지 못했다.
결국 자리에 앉은채로 실수를 해버렸고, 짝궁이었던 여자애가 선생님께 말했다.
30cm짜리 자로 손바닥을 맞은 기억은 있는데 그 다음 장면은 기억에 없다.
6학년때는 친구들과 활발하게 잘 지내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수업 중 돌아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읽기를 시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연속선상에서 중학교 1학년 수학시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중학교때 영어도 좋아하고 잘했는데 일어나서 읽어보라고 하면 알파벳을 만들고 있을뿐이었다.
집에서도 혼날 일이 생기면 아빠 앞에서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런 나를 보고 답답해했던 아빠의 한숨 섞인 멘트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니가 생각해도 한심하지?"
그땐 몰랐지만 꽤 큰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나는 절대 내 아이에게 저 멘트만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직까지는 나와의 약속이자 다짐을 지켜내고 있다.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다.
"넌 벙어리야? 왜 말을 못해?"
나도 말을 유창하게 하고 싶었다.
남들 앞에서 멋있게...
그러나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 할머니와 고모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수다쟁이였다.
그러나 조금 낯선 환경을 맞이하면 어김없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중3이 되었을 때 나의 그런 모습이 너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할 수는 있을까?"
나의 이런 극 I 같은 성향의 종말은 고등학교에 진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90년대 끝자락.
당시 청소년 드라마 "나"의 인기가 높았다.
나도 배우 최강희 팬이라 그 드라마를 좋아했었다.
덕분에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방송반 인기도 높았다.
그렇다고 내가 감히 방송반 활동을 한다는 상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야 우리 방송반 지원해보자."
중3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갑작스러운 제안을 한 것이다.
"어우 야 내가 무슨 방송반을 하냐? 수업시간에 책도 못읽는데...."
친구는 나의 걱정을 들은채도 하지 않고 지원서를 내밀었다.
신기한 건 지원서를 보는 순간 설레고 심장이 주책맞게 뛰었다.
싫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수업내내 지원서를 작성하고 방송반 활동을 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 지원서를 몇일동안 품고 다녔다.
제안했던 친구는 벌써 제출하고 나에게 물었다.
"너 지원서는 냈냐? 마감 얼마 안남았어 인마. 빨리 내"
방송반은 4층 복도 바로 앞에 있었다.
주황색 철문에 노크를 하고 문을 빼꼼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좁고 작은 복도가 보였다.
좌측으로는 기술실이 있었고 정면에는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너 누구니?"
깜짝 놀라 돌아봤다.
방송반 고3 선배 누나였다.
"안녕하세요."
"방송반 지원하려고?"
".....네."
"안에 아무도 없어? 내가 전달해줄게 줘."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교실이 있는 1층으로 잽싸게 내려왔다.
방송반은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봐서 최종 선발된 인원만 활동할 수 있었다.
면접날 방송반 문을 열었을 때 놀라운 풍경을 보고말았다.
50명도 넘을 것 같은 인파가 그 좁은 공간에 모여있었다.
면접을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지원서를 받아준 선배와 마주쳤다.
"어? 너 그때 걔 맞지? 면접 봤어?"
"....아뇨."
"근데 어디가?"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선배는 나를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네?"
"아니,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뭐?"
"....."
"너 원래 말 끝을 흐리니?"
".....아뇨."
그랬다. 나는 긴장되면 말끝을 흐리는 습관이 있었다.
선배의 표정은 단호하고 무서워보였다.
"들어가."
"네."
"들어가라고."
"네."
면접 장소로 들어가라는 선배의 말,
그리고 "네"라고 영혼없이 대답하던 내 입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 면접을 마친 친구들이 하나 둘씩 교실로 돌아갔다.
용기를 내 다시 방송반의 철문을 열었을 땐 한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지원자가 빠져있었다.
난생 처음 면접이라는 걸 경험한 1999년의 추운 봄날.
2학년 선배 3명과 마주 앉아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교실로 돌아갔던 내가 너무 초라했다.
결과를 볼 필요도 없는 면접이었다.
"1학년 1반 ㅇㅇㅇ, 1학년 2반 XXX, 1학년 3반 ㄷㄷㄷ"
방송반 합격자 명단을 불러주는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같은 반 친구들은 환호했고, 축하도 많이 받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왜? 나를 왜 뽑아줬지?"
세계 10대 미스테리 중 한가지 사건 급의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랬다.
나중에 알고보니 지원서를 받아준 누나가 내 지원서를 읽어보고 국장을 맡고 있던 형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 형도 내 지원서를 보고 말했단다.
"얘는 작가로 무조건 뽑아야겠네."
그렇게 나는 방송반 작가로 합격한 것이었다.
동기 아나운서 여자애들의 방송 주제와 음악에 어울리는 멘트를 작성하고,
그 애들이 방송하는 모습을 보면 참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날 방송반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너 몇등으로 입학했어?"
"등수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하위권일거에요. 두 단계 상향지원한거라서요."
"너 글 잘써?"
"좋아해요."
비웃음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표정을 짓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야 너 국어점수 몇 점이나 나와?"
"칠십..."
"야 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방송반은 성적 안좋으면 바로 짜르는게 내 원칙이야.
근데 넌 합격할만한 성적도 아니었고, 나는 니가 싫어. 다른 동아리 활동 알아보고 공부나 열심히 해."
"죄송합니다...."
"아니 니가 죄송할 일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나는 참 답답했다.
도대체 뭐가 죄송하다고 사과를 그리도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나를 마음에 들어해줬으면...하는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하교하며 서러운 감정이 밀려들었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그저 한 여름밤의 꿈같은 일이 잠시 벌어졌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삼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점심시간이었다.
방송반 국장 선배가 교실로 찾아왔다.
내가 방송반에서 짤린걸 뒤늦게 알게 된 선배는 나에게 복귀하라고 했다.
선배가 졸업한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나를 지키기 위해 본인이 선생님께 매를 엄청 맞았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그렇게 학생들을 때렸는지 모르겠다.
딱히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매로 다스리던 선생님이 참 많았다.
어쨌든 선배의 보호아래 나는 방송반에 복귀를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작가 파트를 없애버렸다.
내가 나갔으니 작가가 없어져서 파트를 없앴다는 궁색한 변명..
솔직한 심정은 정내미가 떨어졌지만 그만큼 하고 싶은 마음도 컸나보다.
결국 남아있는 파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해서 아나운서는 못하겠고, 그때나 지금이나 똥손이라 카메라는 자신이 없었기에 "보도" 파트를 선택했다. 그러나 보도는 금요일마다 점심방송을 진행해야했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연습할 땐 장난도 치면서 잘하다가 마이크 앞에만 앉으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런 내모습을 동기들은 놀리고 무시했다.
갑자기 방송반 문이 열리더니 지원서를 받아준 선배가 들어왔다.
"연습 많이 했어?"
"네."
"해봐."
"네? 뭘요?"
"멘트 연습한거 내 앞에서 해보라고."
"갑자기.."
"야!"
"....."
"고3 선배가 멘트 봐주겠다고 일부러 왔는데 너 지금 장난치는거야?"
무서운 말투보다 공부해야 하는 고3 선배가 왔다는 감성마케팅이 나에게 통했던 모양이다.
아나운서 흉내를 내가며 내가 쓴 멘트를 읽어내려갔다.
동기들은 키득거리면서 나를 무시하기 위한 장전중이었다.
"좀 더 자신있게 해볼래? 너 목소리 좋아. 잘 살려봐"
"제 목소리가 좋다고요? 느끼하다던데..."
"어떤 새끼가 그래? 누구야? 이름불러."
웃던 동기들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반면 내 자신감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좋다고, 잘 살려보라는 말을 해준게.
그날이 시작이었나보다.
말을 더 잘하고 싶고, 멋있게 하고 싶고, 재미있게 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겨버렸다.
주말에 교보문고로 달려갔다.
지금처럼 화술이나 연기 관련 교재가 많지 않았다.
이 책은 고1 내내 품에 안고 살았다.
읽고 또 읽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극영화과 진학을 꿈꾸기까지 했으니 내 인생에 참 많은 영향력이 있었던 책이다.
그런데 1년 정도 지난 후의 나는 말을 잘하고 있었다.
더이상 번호 불러서 책읽으라는 수업시간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이 방송반이라며 내가 읽는 느낌이 꼭 방송하는 것 같다며 인기몰이까지 했다.
극기훈련, 축제, 수학여행을 가면 장기자랑 무대에도 올라가 잘 잘하지도 못하는 노래까지 부르는 경지에 도달했다. 인간의 능력치 확장성이 어느정도인지 궁금할만큼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학은 음악과에 진학해 성악을 전공하고, 해군부사관 시절 수병들을 통솔하고, 무용 콩쿨 무대에 올라 금상을 수상하고, 돌잔치 사회자로 활동하고, 사업계획서 IR 발표를 하고, 한 회사의 대표 자격으로 미팅을 수시로 하는 지금의 모습까지...
방송반이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방송반을 지원하자고 제안했던 절친, 지원서를 받아준 선배, 나를 지켜준 국장 선배, 나를 싫어했지만 마지못해 받아준 선생님까지..
내 삶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 헛된 인연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삶에 들어온 사람은 다 이유가 있다는 말, 완전 인정한다.
"저는 원래 I에요. 선택적 E일 뿐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유머인 줄 알고 박장대소한다.
그 분위기가 재미있어서 나도 자꾸 하게 되는 말이다.
그러나 1999년을 돌아보면 저 말은 웃긴 말이 아니라 슬픈말이다.
우리 둘째인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복사 붙여넣기 한 것 같다.
그래서 딸과 손잡고 학교에 갈 때나 공부방에서 데리고 올 때 말해준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는데 오늘 안나왔을 뿐이야. 실수해도 괜찮아. 아빠는 실수대마왕이었어."
대마왕이라는 말에 빵터지는 딸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지켜보는 아빠가 되어있는 나는
사람이 살면서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이 글을 읽어주신 감사한 독자분들께 질문을 드리며 마칩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사람을 기억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