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는 서둘러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옷장을 열어 뭘 입을지 고민하며 대여섯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는 자신을 보고 갑자기 긴장감을 느꼈다.
“꼭 신경쓰려고 하는 날은 평소보다 더 이상해진단 말야.”
미리는 입었던 옷들 중 어떤 것도 꼭 맘에 드는 게 없다는 걸 거울로 확인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점점 촉박해져 왔다. 분명 준비하기 시작할 때는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20분 이내에 나가지 않으면 늦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입고 나가야겠어.”
미리는 청바지에 청보라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검정 자켓까지 챙겼다. 검정색 가죽 숄더백을 메고 종로행 버스에 올랐는데, 운 좋게도 맨 뒷좌석에 자리가 난 걸 보고 고민할 새 없이 앉았다.
옷을 고르느라 집에서 화장할 시간이 없어 맨 얼굴로 나온 그녀는 뒷좌석에 앉아 메이크업 파우치를 꺼내 하나 둘씩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완벽한 메이크업을 끝낸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여유를 좀 부려볼까 했지만 두근대는 심장을 어찌 잠재울지 몰랐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더 집중될까봐 고개를 돌려 부산스럽게 버스 안 사람들을 구경했다.
“왜 이렇게 떨리지? 처음 만날때도 이렇게 긴장되진 않았는데.”
종각역에 내린 미리는 다행히 오후 4시에 맞춰 약속 장소인 블랑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터벅터벅 안쪽을 바라보며 금형을 찾는데 멀리서 유독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그 순간 미리의 가슴은 더욱 가쁘게 뛰었다.
“아. 금형님.”
“미리님. 고생했어요. 잘 오셨어요. 여기는 제가 꽤 오래전부터 다닌 곳인데 술이랑 음식 다 맛있는 곳이에요. 메뉴판 보고 한번 골라보세요. 아무거나 골라도 맛은 제가 보장합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술과 음식이 나왔고, 사장님 같은 분이 음식을 먹는 방법에 대해 잠깐 설명을 해주셨다.
“이 요리는 배추랑 각종 야채를 사용한 채수로 만든 국물이 베이스인데, 샤브샤브처럼 먼저 익은 야채랑 고기를 곁들여 드시면 더 맛있게 즐기실 수 있을 거에요.”
금형과 미리는 오랜만에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살짝 웃어보였다.
금형은 미리의 술잔에 술을 또르르 따랐다.
“미리님. 제가 지금 따르는 술이 일품 진로잖아요? 술이 투명하지만 보통 하얗다고 표현하죠. 이 가게는 투명한 술 위주로 취급하는데 그래서 가게 이름이 화이트를 뜻하는 ”블랑“이라는 불어에 술 ”주“자를 조합해 만든 곳이에요.”
“짠”
들어올린 잔에서 마주치는 소리의 음률이 그 둘의 눈을 타고 경쾌하게 넘실거렸다.
미리의 첫 잔은 무서울 만큼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