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으로 처음 일 해보기
오랜만에 직장동료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그날은 마음이 더 편안했다.
다들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둘은 여전히 그 직장에서, 하나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으며, 나만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온 상태였다.
이제는 공통 업무로 주구장창 얘기를 하는 사이는 아닐지라도 그 관계는 오랜시간 동고동락하면서 동료애를 넘어선 뭔가가 있었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고 일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나 또한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쩐지 그리 오래된 과거도 아닌데 생각이 잘 나지 않았고 몰입도 잘 되지 않았다.
정말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러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이미 나는 그 과거를 돌아서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20여년을 함께 했던 직장생활은 말 그대로 과거이자 이제 나에게는 비현실 세계이고, 비록 얼마 안됐지만 앞을 향해 걷고 있는 이 길이 에릴만큼 내 앞에 놓인 현실인 것이다.
미련도 후회도 없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영업생활을 오래 해온 내가 일러스트 디자인을 하고 글을 쓰기로 맘을 먹고나서 부터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좋은 사람들과의 소통은 더 소중한 것이 됐다.
업무로 인해 불필요하게 엮인 관계를 더 이상 꾸역꾸역 잇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은 아마도 퇴사한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자 치료제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과 얘기가 잘 된 날은 마음도 덩달아 누그러지고 편안해졌다.
고속터미널에서 목적지가 적힌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평화로운 마음으로 등을 기댔다.
그런데 기대자 마자 바로 "우"하고 진동이 울렸다.
몸도 마음도 피로하지 않아 또렷했던 상태였기에 얼른 알람을 확인했다.
평소 숨고라는 플랫폼에 일러스트 디자인 고수로 등록해뒀었는데 견적 의뢰 알림이 온 것이었다.
숨고 플랫폼은 퇴사를 하고 알게 되었는데, 회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일하며 먹고 사는지가 궁금해 이리저리 검색해 보다가 알게 되었다.
그 후 제과 제빵 학원을 다녔고 뒤 이어 디자인 학원을 등록해서 다녔다.
나는 디자인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도대체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일하고 사는 건지 도저히 알 길이 없어 숨고나 크몽같은 플랫폼을 뒤져보며 대충 어림짐작으로 파악을 할 수 있었다.
플랫폼을 들여다 보면서 시장조사도 대략적으로 하고 가이드도 읽어보며 실제 견적을 던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던진 견적은 수수료만 날린 채 성과없이 끝나버렸다.
기본 실력이라도 갖추고 제대로된 시장조사를 마친 후에나 견적을 던지리라 다짐하고는 한동안 숨고에 관심도 사라지고 흥미를 잃었었다.
솔직히 이게 되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날은 뭔지 모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등에 기대자마자 울린 알람에 눈을 번쩍 뜨고 급히 손가락을 움직여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곤 반사적으로 떨리는 마음으로 견적 내용을 작성하고는 의뢰 고객에게 전송했다.
너무 긴장되서 다시 등에 기대지도 못하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웅"
곧이어 알람이 울렸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워 확인을 했고 진짜 숨고에서 답장이 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렇게 흥분이 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숨고를 통해 디자인을 외뢰한 고객이 그 많은 디자이너 중 나를 선택해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와"
손도 떨리고 긴장되서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우물쭈물 거릴 수는 없었다.
디자인 일을 한 경력은 극히 짧지만 난 오랜 경력의 일꾼이다.
어차피 일을 하는 과정은 다 거기서 거기다.
본능인지 뭔지 몸에 깊숙히 박힌 일꾼의 모습으로 또렷하게 하나 하나 답변을 이어 나갔고, 본격적인 내용은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아 진행하기로 했다.
이로써 본격적인 디자인 일감의 첫 의뢰 테이프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