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셀카는 늘 화제다. 왜냐하면 그의 신계 비쥬얼이 1도 녹아있지 않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다소 기괴스럽기 까지 한 그의 사진은 단 두가지 정도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여기 정우성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이런 행보를 두고 사람들은 말한다. 워낙 평소에 잘생겨서 셀카에 간절함이 담겨져 있지 않다고. 또 다른 신계 비쥬얼인 강동원 역시 그와 비슷한 종족임을 셀카를 통해서 자주 보여준다.
셀카의 역사는 증명의 역사다. 무엇을 증명하고자 했는가? 곧 ‘나는 생각보다 아름답다’이지 않을까.
나의 우주 안에서 최초로 경험했던 셀카는 하두리 캠이었다. 친구네 집에서 어떻게 하면 1cm라도 잘생겨 보일까 캠을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했던 추억이 있다. 내 얼굴에도 잘 생김이 묻어있다고 증명하고 싶은 욕구의 반영이었다.
이 증명의 욕구는 셀카의 기술을 발전시켰다. 한 시대의 획을 근 ‘얼짱각도’는 도로에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페인팅을 해서 길을 따라가게 만든 발명과 동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진화는 가속되었다. 각종 스킬이 등장했다. 볼에 바람 넣기, 턱선에 손포개기, 턱 당기고 눈 동그랗게 뜨고 셀카인 듯 타카인 듯 셀카 같이 찍기 등등. 아름다움에 대한 증명 욕구는 그토록 간절했다.
시대는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들었다. 최첨단(?) 보정 어플들이 등장함에 따라 스킬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셀카봉의 공로를 기억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정점은 AI 보정 기술이었다. 복잡한 보정 필요없이 그냥 AI느님의 손에 맡기면 누구든 절대치의 미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사진에서만.
이 부분에 있어서 최근에 웃픈 뉴스를 봤다. 성형외과에 와서 시술을 받고 난 후 AI가 보정해준 사진을 들이밀면서, 이게 나인데 시술을 했는데 왜 더 못생겨졌냐고 컴플레인을 건다는 것이다. 상당히 뒤틀린 증명의 욕구가 아닌가 싶다.
다시 돌아와서 우성이형의 셀카를 바라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이 사람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증명하고픈 욕구, 그 간절함이 1도 없다. 왜? 이미 그는 거의 모두를 통해서, 사진이 아닌 실물이 존잘로 증명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삶에 태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존재는 스킬이나 보정을 통해서 증명하려 할수록 실제와 멀어진다는 것이다. 보여지는 이미지는 중요하다. 이미지를 메이킹 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존재와 전혀 동떨어진 보여지고, 만들어진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스킬로 만들어낸 것이고, 보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게걸스럽게 증명 욕구의 배를 채우기 위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존재 자체에서 발현되는 이미지와, 그것을 잘 다듬은 메이킹은 원천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딱히 증명 욕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왜? 내 본체, 존재가 존잘이니까, 그게 실제니까, 자신 있으니까 그러한 것이다.
존재 자체가 존잘, 존예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존중이다. 근데 우성이형 진짜 얼굴 그렇게 쓰려면 그냥 나 좀 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