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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의 의미

매 년 먹는 떡국처럼

by 클라우드나인

우리 가족은 1년에 최소 4번은 여행을 간다. 이렇게 해 온지도 10년이 훨씬 넘었다. 어릴 때야 엄마, 아빠가 가자는 대로 갔었지만 대학교에 가고 나서는 왠지 모를 의무감에 가족들을 소집하곤 했다. 한창 늦은 사춘기를 겪던 동생은 왜 가족 여행이나 모임에 참여해야 하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무조건 가야 한다며 국내, 해외 여행을 추진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내가 여행 갈까?라고 물어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엄마, 아빠가 먼저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눈치이다. 가끔 바쁠 땐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엄마 아빠가 우리랑 시간 보내는 걸 행복해하는구나 생각하면 없던 시간도 어떻게든 생기게 한다.


이제는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일처럼, 매 년 먹는 떡국처럼,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일상이자 우리만의 전통, 문화가 되었다. 보통 전통은 지키라는 사람 입장에서만 좋고 지키는 사람들은 싫어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이 전통은 모두가 좋아해서 특별하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라는 말을 쉬우면서도 어렵다. 일상을 살면서 익숙한 것도 낯설게 보고, 항상 설레이는 기분으로 있기란 어색하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우리가 어려워하지만 여행에서는 한결 쉽게 하는 것들을 위해 여행을 간다. 특히 가족여행은 혼자 가는 여행, 남편이랑 둘이랑만 가는 여행과는 다르다.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 경험을 가진 멩버들이 3명이나 늘어난 거다. 누가 하나 웃긴 실수라도 했다치면, 앞으로 10년은 밥 먹을 때마다 그 이야기가 등장할 거다. 혼자 가는 여행에서는 나의 취향에 맞춰 공간들을 빠르게 훑어보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느끼는 것에 집중한다. 가족끼리 가는 여행에서 나는 그 풍경 속에 있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시간을 단순히 쓴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우리만의 시간을 차곡 차곡 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여행 중에는 내가 아무리 잘 준비하는 프로여행러라도 예기치 못한 사고나 사건의 발생으로 마주치기 싫은 순간들을 만난다. 미국 LA에 갔을 떄 테슬라 전기차를 빌린 적이 있었는데, 처음 타보는 전기차 조작법도 어려운데 전기충전소를 못 찾아서 거의 차가 길바닥에서 멈추기 직전에 충전소를 찾았던 아찔한 경험이 있었다. 그 중에 운전 가능한 건 나뿐이라 책임이 막중한데, 아빠는 짜증내고 한숨쉬고, 동생이랑 엄마는 내 눈치 보고, 나는 그런 가족들을 등 뒤에 두고 식은땀을 흘렸다. 진짜 울면서 차 두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그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흐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하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는 해결돼 있을 거고 이 상황을 웃기게 얘기할 날이 오겠지' 하고 말이다.


여행에서는 30년을 봐왔던 가족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한다. (물론 원래 알던 모습이 더 잘 보이기도 한다) 아빠가 여유롭게 비치 클럽에서 수영을 즐기는 걸 좋아한다던지, 그리고 아빠가 벌레는 너무 싫어해서 에어비앤비보단 관리가 되는 호텔에서 묵고 싶어한다던지 하는 것 말이다. 엄마는...몰랐던 모습이라기보다는 원래 있던 모습을 더 강렬하게 본 것 같다. 이를테면 붙임성 너무 좋아서 진짜 말도 안 통하는데 10인 도미토리에서 다른 어린 친구들이랑 이미 수다를 떨고 있다던지, 열심히 돌아다니는 거에 사명감이 있는 사람처럼 (나한테 절대 안 말하고) 힘들어도 꾹 참고 2만보씩 걷는다던지 하는 거 말이다.


나는 ENFP에서 강력한 P라 정말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인데, 여행에서는 거의 전문여행사 수준으로 준비한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20일 유럽여행 가면 매일 10분 단위로 계획표를 짜서 대안도 마련해놓고, 티켓 사야 되면 티켓 자판기 사진까지 첨부해놨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하나... 생각해보면 나는 혼자 있으면 여행에서 많은 어려움도 해결하고 동시에 즐길 수도 있는데, 엄마 아빠는 그 어려움이나 불편함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을 다 즐기기에도 부족하니까, 기분 좋은 것들로만 채우기 위해 내가 약간의 민감함과 배려를 발휘해왔다. 게다가 내가 한 노력들을 가족들이 알아주면 내가 머리 싸매고 고생했던 기억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없다. 또 나는 엄마 아빠가 더 많은 것들을 눈에 담기를 원한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공간, 새로운 음식,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내가 조금 먼저 봤거나 볼 것들을 함께 봤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담긴 시간들의 색과 질감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모양을 늘리고 싶다. 그래서인지 이제 금방 다가올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여느 때처럼 똑같이 이동수단을 예약하고 밥 먹을 곳을 찾고, 함께 할 액티비티를 예약하면서 더 즐거웠다. 엄마, 아빠와 그 이동수단에서, 그 밥 먹는 곳에서, 그 액티비티를 통해 어떤 시간들을 또 담아올지 기대가 됐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처럼, 매년 먹는 떡국처럼 올해도 우리 가족은 여행을 계획 중이다. 이제는 다들 이 '여행 문화'에 익숙해졌는지 '저기, 혹시... 우리 여행 가는 거 어때?' 가 아니라 '여행 어디 갈거야?'를 묻는 가족들을 본다. 다른 전통은 다 사라져도 우리 집의 '여행 문화'는 언제까지고 남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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