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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정폐쇄 Jan 10. 2019

착상 (3)

강신주  <감정수업>


영화든, 소설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모든 문화매체의 기본 속성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국어사전처럼 몇 가지 단어들의 조합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언어는 제 아무리 풍부해도 자신의 감정을 도무지 따라 갈 수 없다. 


그러던 중, 평소 사형처럼 모시는 창선배에게 책을 한권 추천받았다. 그것은 바로 강신주 작가의 <감정수업>. 이 책에서는 이 감정이라는 것을 디테일하게 잘 나누고 제법 그 설명을 잘 달아 놓았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문학작품들도 발췌를 해놓아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만약 극작을 염두해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강신주의 <감정수업>은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극작서는 아니지만, 극작을 하는데 있어 색다른 시각을 가지게 해 준다. 보통 플롯을 구성할 때 가장 신경쓰는 것이 인과관계, 개연성 이런 것들인데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감정 전달이지 않는가. 감정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나 학술논문을 준비하는게 아니라면 개연성을 너무 신봉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내 작품에 어울리는 감정은 어떤게 있을까 살펴보려고 종종 책을 뒤적이고는 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대략 이런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 책을 알려준 창선배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 말씀을 올린다.


꼭 이것을 믿고 따를 필요는 없지만, 한번쯤 참고해 볼만 하다.

 

사랑.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자발적 노예 상태에 빠지는 것.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p.79)

 

반감. “아픈 상처가 만들어 낸 세상에 대한 저주”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과거에 미워했던 다른 사람이 떠올라서 슬픈 감정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지금 보고 있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그렇지만 이 미움은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인 것이다. (p.113)

 

박애.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겨울의 찬 바람에 애인이 떨고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더라도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우리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 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 같은 도시나 같은 국가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공동체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p.126)

 

연민.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 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p.130)


욕망.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출발의 설렘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나만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완성의 허무함이 있다면, 과거 우리의 욕망은 불행히도 타인의 욕망을 반복했던 것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p.188)


미움.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되거나”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참고.


후회.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중략) 만약 어떤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후회라는 슬픈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p.394~p.395)


희망.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결과가 어느 정도 의심되는 기쁨’ 그러니까 ‘불확실한 기쁨’이 바로 희망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확실’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찍어야만 한다. (중략) 나무가 있어서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희망에 따른 그 미래의 설렘이 있기에 불확실성도 발생한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견디기 힘들도록 무섭다는 이유로 희망의 싹을 자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p.442~p.443) 아이는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의 기쁨에, 어른은 불확실성에 더 신경을 쓴다. (p.448)

 

오만.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p.454) ‘너에 대해 나는 모르는 것이 없어.’ 오만한 사람의 내면을 이만큼 분명히 보여주는 표어도 없을 것이다. 오만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항상 전지전능하다는 자신감에서 싹트는 법이다. 그래서 오만은 항상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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