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궁합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배움이 있다고 한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그 점을 본받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는 논어의 문장이다. 두 사람 모두가 나보다 낫거나 나보다 부족해도 마찬가지다. 둘 이상의 타인은 다수가 되어 사회적인 척도를 대변한다. 적어도 내가 평균값에 도달하는지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두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하나가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우열을 가리기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쉽지 않다. 이럴 때 내 대답은 ‘궁합을 봐야 한다’.
특히 여행이 그렇다. 셋 이상이 모여 여행을 가면 결정을 내릴 때 다수결이라는 사회적 장치가 생긴다. 마찰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협의를 이끌어낼 수단이 있는 셈이다. 의견 합치가 어려운 대신 그만큼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도 잘 안다. 나 하나는 아쉽더라도 공리주의적 기준에 의해 다른 이들이 행복하면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여행을 가면 딱 두 가지 선택지만 남을 뿐이다. 내 기준에 맞추거나, 네 기준에 맞추거나. 항공이나 숙박 같은 큼지막한 부분부터 여행지에서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지 편하게 우버를 타는 게 좋은지, 낯선 곳의 길거리 음식을 도전하는지 도시의 유명한 맛집을 예약하는지와 같이 작은 (하지만 결코 사소할 수 없는) 것들까지. 두 선택지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이었는지는 여행이 끝나고도 평생 모른 채로.
그런 점에서 나는 Y와 궁합이 꽤 잘 맞는 편이었다. 항공권을 예약할 때부터 알았다. 경유를 하더라도 경유 시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기는 싫고, 저렴하게 가고 싶지만 그렇다고 대형 항공사의 깔끔함을 포기할 정도로 기준을 낮추고 싶지는 않은 그 애매한 지점을 우리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게다가 결정한 후에는 속전속결로 진행하기까지. 내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곧장 결제까지 해버리자 Y는 나의 빠른 결단력에 놀라워했고, 나는 Y가 나의 성격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해온) 조급함으로 바라보지 않은 것에 감동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우리는 숙소 취향까지 비슷했다. 휴식은 그 공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게. 무조건 호텔로. 저렴한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싼값에 품위까지 팔지 않도록. 내가 항공권을 알아보고 결제까지 도맡았기 때문에 Y가 이번엔 자신이 숙소를 알아보겠다며 나섰다. 이렇게 업무분담이 매끄럽게 되는 것조차 대단하지 않은가.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더라도 여행 성향만큼은 좀처럼 맞출 수 없었던 나에게 Y는 하늘이 점지해준 짝 같았다. 궁합률 99퍼센트. 우리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여행 메이트였다.
우리는 수많은 호텔 후보들을 들여다봤다. Y가 호텔의 이름과 금액을 가지고 오면 내가 호텔의 후기를 찾아보는 식이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 괜찮은 숙소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와이, 그것도 호놀룰루에 간다면 그 유명한 와이키키 비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오션뷰 테라스에서 빅웨이브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한 번쯤 그리지 않나. 달콤한 상상도 잠깐, 해변가 호텔들의 어마어마한 가격에 우리는 기가 죽고 말았다. 마음 같아선 스파와 수영장까지 있는 오션뷰의 고급 호텔을 냉큼 예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호텔들은 5박에 150만 원이 훌쩍 넘었고, 그런 알찬 호텔을 간다고 해서 야무지게 호캉스를 즐길 리도 없었다. 하와이에서의 다섯 밤은 그곳의 자연과 일상을 즐기기에도 빠듯할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제값을 하는 호화로운 호텔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구한 관광지의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대부분의 호텔은 낡고 구식이었다. 게다가 하와이 호텔에는 다른 데서는 듣도보도 못한 리조트 피Resort Fee라는 추가금마저 있었다. 이 금액은 호텔스닷컴이나 부킹닷컴 따위가 보여주는 '총 요금'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5박에 100만 원 하는 호텔이 괜찮아 보이다가도 리조트 피가 40만 원인 걸 확인하면 뒤로 가기를 누르길 몇 번이었다. 도저히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냉철하게 선택과 집중을 하기로 했다.
“오션뷰를 포기하자. 그럼 우리가 더 많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거야.” Y의 의견이었다. 그 말대로 시티뷰이거나, 와이키키 비치에서 한 블록이라도 더 들어가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 호텔은 오션뷰 객실에 비해 20퍼센트 정도는 저렴했다. 숙박에 너무 큰 돈을 쓰지는 않더라도, 오션뷰에 들일 돈을 차라리 숙박의 다른 부분에 투자하는 게 우리의 상황에 맞았다.
수많은 객실들을 살펴보며 점차 우리만의 기준이 정해졌다. 첫째. 오션뷰는 포기하더라도 와이키키 비치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일 것. 매일 해변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게.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둘째. 호텔 수영장이 있을 것. (나는 특히나 호텔 수영을 좋아한다.) 셋째, 하와이 호텔들의 수준으로 보아 적어도 4성급은 될 것. (어쩐지 모든 기준이 나인 것 같지만, 하여간.) 하지만 그 모든 기준들보다 가장 앞선 건 예산이었다. 10만 원쯤이야, 하다가 100만 원 초과하기가 순식간이라는 건 하와이로 여행지를 결정한 그 순간으로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하얏트 리젠시와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를 고민하긴 했지만 말이다.
여행지를 고르는 시간보다는 짧은 고민 끝에, 우리의 숙박 후보는 세 곳으로 좁혀졌다. 애스턴 와이키키 비치, 힐튼 와이키키 비치, 그리고 하와이 힐튼 가든 인 와이키키. 우린 호텔 예약 앱에 이 세 호텔의 최저가 알람을 해두고 특가를 노리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힐튼 가든 인 와이키키가 70만 원대로 떨어지기도 하고, 애스턴 와이키키 비치가 90만 원대가 되기도 했다. 객실비는 파도처럼 출렁였다. 110원에서 140만원까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결단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내일이면 더 저렴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오늘의 특가를 보내주길 몇 번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묘하게도 한 곳으로 정해졌다. 합리적인 금액인 데다 아주 약간이지만 오션뷰도 걸쳐 있는 애스턴 와이키키 비치로. 결제 직전, Y가 그곳의 충격적인 단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 프리 와이파이가 아니야.” 세상에. 알아보니 애스턴 와이키키 비치에는 와이파이 이용료로 1박 당 4만 원을 내야만 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객실 와이파이를 돈 주고 파는 호텔이 있다니? 정말이었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나온 객실 옵션만 그랬다. 기본 금액은 조금이라도 낮춰놓고 와이파이에 얼마, 리조트 이용료에 얼마, 보증금에 얼마…….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게 서울이라더니. 하와이는 눈 빤히 뜨고 있는데도 내 예산을 반토막 내려하고 있었다. 적어도 서울은 지하철에서도 프리 와이파이라고. 우리는 이만 애스턴을 놓아주기로 했다. 안녕.
결국 우리의 선택은 힐든 가든인 와이키키 비치였다. 5박에 92만 원. 시티뷰에 조식 없는 깡통 컨디션이었고 이것조차 리조트 피와 디파짓을 제외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와이파이는 프리였다. 어쩌겠어. 하와이잖아. 미련은 없었다. 이번 결제도 단숨에 해버렸다. 많은 걸 포기했지만 또 많은 걸 아낀 선택이었으니까. “어차피 애스턴은 샤워부스도 별로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꽤나 궁합이 잘 맞는 여행 메이트였다.
가장 중요한 항공과 숙박이 해결되었으니 이제는 숨을 고를 때였다. 봄이 오면서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여행 계획도 순항이었다. 나와 Y는 여행을 체계적으로 계획했다. 구글 시트에 엑셀로 표를 만들어 여행 계획을 짰고, 하와이에 대한 책을 사고, 그 지역에 대해 공부했다. 빅 아일랜드와 카우아이가 뭐가 다른지, 어떤 외섬들을 가야 아쉽지 않을지 고민하고 하와이에서 볼 수많은 별들과 거북이를 상상했다. 태평양의 파도를 타는 즐거움과 적도 부근의 눈부신 태양도 아주 약간은 걱정했다. 물론 여행을 계획하면서 계획을 계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서울의 다양한 맛집을 다녔고, 서점에 들르고 책을 읽었다. 하와이에 대한 이야기에 꼬리를 문 건 젊은작가상과 좋아하는 작가와 국제도서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Y와 이렇게 많은 걸 공유할 줄 몰랐다. 그동안 왜 진작 이렇게 친해지지 않았을까. 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이전의 섣부른 우려나 판단과 하등 상관없이 하와이의 태양마차는 경쾌한 질주를 하고 있었다.
여름은 빠르게 지나갔다. 출국까지 한 달가량 남았을 때였다. 미국 땅답게 하와이에 가려면 관광 비자와 ESTA를 신청해야 했다. 한동안 느슨하게 두었던 하와이 일정을 다시금 재정비할 차례였다. 혹시나 입국을 거절당하면 어쩌나 싶은 부질없는 걱정도 잠시였다. 정확히 일주일 만에 통과된 ESTA를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더 할 것도 없었다. 현지에 가서 체험할 액티비티는 대부분 여름이 시작될 때부터 예약을 해두었고, 회사에도 일찍이 소문을 내서 하와이 여행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이제는 오직 출발할 일만 남은 상태였다. 모든 게 계산대로 정확히 흘러가고 있었고 그 어떤 불길한 예감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낙원이 코앞이었다.
9월의 어느 주말 아침. Y가 느닷없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게 뭔 소리야? 나 당직하는데 이런 메일이 왔어.” 그가 보낸 사진은 모바일 메일함의 캡처 이미지였다. 메일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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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불운은 노크조차 하지 않고 인생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