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쩌다 태평양까지 가게 되었나
물론 처음부터 하와이를 우리의 여행지로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으레 그렇듯 가볍게 국내여행이었다. 다만 통영이나 부산처럼 바다가 보이는 휴양지면 좋을 것 같았다. Y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했다. 우린 너무 오래 취준 시기를 지나왔고, 또 휴식기 없이 취업해 각자 워라밸 나쁘기로 이름난 업계에서 막내로 굴려지던 차였다. 도시를 배회하며 문화생활을 즐길 심리적 여유는 없었다. 푸른 산과 맑은 바다를 보며 정신을 맑게 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우리가 여행을 고려하던 때는 2월. 발끝까지 얼어붙던 한겨울이었다. 그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미래에 쏟아질 뜨거운 햇살과 따뜻한 바다를 상상할 작은 희망이 있어야 했다.
그럼 제주도에 갈까? 그러자 둘 중 누군가(아마도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제주도는 뭔가 뻔한데. 이왕 비행기 타는 거 해외로 가는 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럼 조금 더 멀리 가보자. 오키나와는 어때? 또 누군가(아마도 Y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그럼 상하이는? 으음. 변변찮은 반응들 앞에서 마음속 지도가 순식간에 대범해졌다. 우린 급기야 스카이스캐너와 와이페이모어를 켜고 항공편과 가격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6개월 후의 표값은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이쯤 되니 더 멀리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지도는 야금야금 범위를 넓혀 태평양 연안까지 닿았다. 싱가포르, 필리핀과 발리까지.
그러던 중 문득 뉴질랜드가 떠올랐다. 필리핀까지 고려하다 보니 그보다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더 나아가서 호주를 건너가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나는 영화 ‘반지의 제왕’의 오랜 팬이기도 했다. 이참에 호빗 마을을 거닐며 맑은 공기를 쐰다면 두 말할 것 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푸른 동산과 잘 꾸며진 자연! (그리고 호빗이라니!) Y에게 선뜻 이 상상을 꺼냈다. 하지만 슬프게도 Y는 뉴질랜드에 대한 어떤 감흥도 없었다. 다만 그에게 더 좋은 선택지를 떠올릴 실마리 정도는 제공한 것 같았다. Y가 뜬금없이 이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나는 하와이에 가보고 싶었어.”
와이키키 비치와 파인애플, 훌라춤이 그 이유였다. 내가 그 순간을 뜬금없다고 기억하는 이유는 하와이는 내가 단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던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Y에게 뉴질랜드가 그런 것처럼, 나에겐 하와이가 난데없이 느껴졌다. 하와이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대학 동기 중 한 명이 교환학생을 갔다 온 곳이라는 정도일까. 지상낙원이라는 별명도 언뜻 들어본 수준이지 그다지 큰 관심도 호기심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뉴질랜드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어떡하지. 겨우 둘이 여행을 가면서 선택지를 이렇게 고민할 줄이야. 이쯤 되니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머리로 지구 반 바퀴를 돌았는데 아직도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더 돌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이대로는 통영은 고사하고 서울에 발붙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결단의 순간. 호빗의 땅이냐, 지상낙원이냐. 푸른 초원이냐, 초록빛 바다냐. 뉴질랜드냐, 하와이냐.
뭐, 휴양지가 거기서 거기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산보다는 바다파이기도 했다. 가자. 하와이로.
마음을 정한 뒤에는 차근차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내가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한 게 있다면 바로 추진력이다. 스무 살부터 달고 다닌 별명은 바로 ‘불도저’.(아는 사람은 알지만, 밀어붙이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고도 간단한 법이다.) 게다가 알고보니 Y는 엄청난 정보파였다. 나의 추진력과 Y의 정보 수집력이 만나자 우리의 여행 계획은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아폴론의 황금마차를 탄 것 마냥, 멈추면 불타 스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냥 메신저 상에서 적당히 계획할 생각은 나도, Y도 없었다. 오로지 여행을 계획하기 위한 정기 모임까지 가질 정도였다. 하와이라는 태양을 끌고 달리는 이 마차의 목적지는 아무래도 현실도피.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하는 건 여행 일정이었다. 해외여행을 갈 때 언제 그 나라에 갈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특히 하와이는 우기와 건기가 있는 태평양의 섬들. 하와이는 우리나라와 달리 겨울에 비가 많이 오는데, 특히 11월은 일 년 중 가장 비가 많이 오는 달이라나. 우리는 휴양지의 따뜻한 햇살이 간절했기 때문에 이 기간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러니 11월부터 3월까지는 패스. 하와이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기간은 4월부터 6월까지로, 이때가 바로 날씨가 좋고 비가 오지 않는 건기다. 그 뜻은 하와이의 성수기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나 일정이 너무 가깝기도 했고, 성수기의 항공권 가격 역시 부담스러웠다. 결국 남은 건 7월부터 10월. 그 애매한 기간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였다. 남은 선택지라고 해서 그 기간엔 언제나 출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 업무를 내팽개치고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까. 광고를 만드는 나도, 뉴스를 만드는 Y도 시즌을 타는 직종이다 보니 언제 어떻게 돌발 이벤트(라고 쓰고 업무라고 읽는다)가 생겨 다 된 여행에 코를 빠뜨릴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임의의 날짜를 정하기로 했다. 유야무야 하며 간만 보다가 아예 여행을 가지 못할 바에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보였다. 항공권을 더 저렴하게 구할 구실이 더는 보이지 않기도 했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항공권 값만 오를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Y와 나는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 성질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마음 먹자마자 곧장 예매해버렸다. 인천에서 호놀룰루까지. 10월 3일 출국행, 10월 8일 귀국행. 나리타를 경유하는 대한항공 비행기. 결제는 일시불로. 회사? 그냥 그때 일정 보지 뭐. 설마 안 되기야 하겠어?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지 않았나. 예매까지 다 했는데 이해해주겠지.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의 패기였다.
그런데 우리가 어쩌다 하와이까지 가게 됐지? 남은 의문이라면 그것뿐이었다. 그렇다. 마치 모닝 타려다가 벤츠 타는 사회초년생 마냥. 단칸방에 숟가락만 들고 들어가려다가 투룸 풀옵션 계약하는 신입생 마냥. 우리는 여름 바다에 발 한번 담가보려다 하와이행 비행기를 결제하고 말았다.
항공권 e티켓이 메일함에 도착하자 그제야 여행이 실감 났다. 하와이에 간다니. 그 티켓은 마치 복권과도 같았다. 존재만으로 많은 상상과 희망을 주는 종이 한 장. 힘든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버팀목. 출국까지 8개월이나 남아있었지만 눈앞에는 본 적도 없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뜨거운 햇살, 달콤한 과일, 그리고 훌라춤! 복권과 항공권이 다른 점이라면 복권은 대부분 상상으로 끝나지만 항공권은 어느 정도는 상상과 엇비슷하게 구현된다는 점이다.
물론 후자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엎어질 가능성이 항상 따라 오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