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와이의 잔상을 떠올리며
여행에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에 일면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역시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여행은 조금 슬프다. 실존하는 물질에 기대어야만 기억된다는 건 오히려 보잘것없는 시간이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어서. 여행은 기억을 남겨야 한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떠오르는 기억을. 그렇게 떠오르는 기억이 단 한 편이라도 있다면 그 여행은 ‘여행다웠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생을 안고 갈 추억이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이든. 두고두고 곱씹는 안줏거리를 만들자는 게 아니다. 그게 어떤 사건이었든 간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면, 지난 시간에 뿌리내린 그것들이 앞으로의 삶에서 예기치 못한 전환점이 되어 문득 그 가치를 드러내리라 믿는다. 내게는 여행의 목적이 그렇다. 나름의 방식으로 삶에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기는 것.
내게 다녀온 여행 중에서 그 잔상이 가장 선명한 여행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하와이를 떠올린다.
2019년 10월, 팬데믹이 전 세계를 덮치기 불과 몇 달 전 나는 하와이에 있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이었다. 긴 업무 끝에 남은 휴가를 겨우 이어 붙인 터라 제대로 준비한 여행도 아니었다. 어느 하나 능숙한 것 없이 어설펐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작은 섬들을 가슴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하와이를 생각하면 으레 기대하곤 하는 백사장과 푸른 바다 때문은 아니다. ‘지상 낙원’이라는 호칭에 걸맞은 풍요로움을 느꼈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기대와는 사뭇 달랐던 날씨와 사라져 가는 자연을 보면서 낙원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간 게 대부분이었고, 많은 실수와 착오를 겪고 아쉬움만 잔뜩 남긴 순간도 여럿이다. 그래서인지 하와이가 남긴 잔상이 ‘추억’이었느냐 ‘악몽’이었느냐 묻는다면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끝없는 지평선과 우중충한 구름, 초록빛 바닷물과 하얗게 바랜 산호초. 친절한 사람들과 뻔한 음식들. 뜨거운 태양과 느린 시간. 그 묘한 불완전함 때문일까. 아이러니하게도 3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불현듯 그 순간을 돌이켜 보곤 한다. 어떤 부분은 희미하게 흐려지고 어떤 부분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재구성되어 변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감도가 짙어져 내 안의 아주 단단한 무언가가 되어간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벅차오르면서도 동시에 불편하기도 하다. 적도 부근의 뜨거운 태양이 자꾸만 내 등을 두드려 그 순간을 돌아보게 하는 것만 같다. 그 손길은 어설픈 단편극의 한 장면처럼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인 순간을 짚어내며 나를 무대 위로 불러 세운다. 하와이의 햇살을 스포트라이트 삼아, 파도가 조각나는 소리를 음악 삼아. 아무래도 어떤 여행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선명한 잔상을 남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팬데믹이 끝나는 시점, 자꾸만 나를 붙잡는 이 기억들을 어떻게든 명확하게 정의해두고 싶어서. 적어도 전 세계적 단절 시기, 마지막으로 다녀온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이라는 구차한 이유는 아닐 거라 믿는다.
이 여행은 여행을 떠나기 8개월 전인 2019년 2월에 서문을 연다. 둘이서 무언가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친구, Y와 함께.
그렇다. 나는 하와이를 친구와 다녀왔다. 그것도 단둘이.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렇듯 남다른 일은 예상치 못한 관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