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블 보이>
코로나가 미세먼지처럼 일상으로 자리 잡은 요즘, 별다른 일이 없으면 되도록 집에서만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 보니 가끔 집 밖으로 나갈 때면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세균으로 느껴진다. 전철 안의 손잡이, 어느 가게의 문고리, 이름 모를 누군가와 스친 옷깃. 이럴 때면 내가 무슨 세균 보는 소녀라도 된 것 같다.
사람 간 2m 거리 두기, 5인 이상 집합 금지. 국가에서 최소한의 경계를 정해주었지만, 지키지 않는 이가 꽤나 많다. 정말 화난다. 이럴 때면 주변으로부터 날 확실히 보호할 수 있는 막을 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스스로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사람과 세 계단 간격을 두고 서기, 지하철에서 내 양옆으로 자리가 비어있지 않으면 그냥 서서 가기, 외식 시엔 되도록 식사 시간이 지난 때에 음식점을 방문해서 다른 손님과 옆, 뒤로 테이블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식사하기.
보이지 않는 나만의 버블에 스스로를 가둔지 2년 차. 종종 오래전 본 영화 <버블보이>가 떠오른다.
면역 기능이 결핍된 채 태어난 주인공 지미는 태어남과 동시에 무균 처리된 버블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그는 방 한 칸 만한 크기의 버블 안에서만 생활하는데, 그가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은 오직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엄마가 보여주는 TV 프로그램과 잡지, 창 밖 풍경이다.
지미는 그렇게 엄마를 통해 본 세상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그러다 창문으로 본 옆집 소녀 클로이에 푹 빠지게 된다. 지미와 클로이는 버블을 사이에 두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비닐 막으로 자신 외의 모든 것과 단절된 채 사랑하는 사람과 닿을 수도, 함께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지미는 클로이 덕분에 처음으로 버블 밖 세상이 궁금해지지만 어쩔 수 없다.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결국 클로이는 떠나가고, 그제야 지미는 용기를 내어 버블 밖으로 나선다.
요즘은 우리 모두가 지미처럼 보이지 않는 버블에 갇혀 사는 것 같다. 어느 날 술에 취한 클로이가 지미의 버블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지미처럼, 누군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당황스러움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코로나가 발병한 이후 청결에 대한 서로의 의견 차이로 연인과 몇 차례 다퉜다. 코로나 시대에 외부 접촉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각자 지닌 버블의 모양과 크기가 조금 달랐을 뿐임을 인지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버블 안에 살고, 사람의 수만큼 버블의 모양, 크기 모두 다양하다는 것을. 누군가의 버블은 팔 한 뼘이면 상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버블은 지미의 버블처럼 방 한 칸만큼 커다랗다는 것을. 버블이 클수록 안전도는 높아지겠지만, 그렇다고 어느 정도의 크기 어떤 모양이 가장 적합한 버블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버블 안에만 있다면 안전도는 또 한 번 높아지겠지만, 버블 안에만 갇힌 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가 있을까?
용기를 낸 지미는 외출용 버블 옷을 입고 클로이가 있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떠난다. 지미는 그 여정에서 다종교, 사회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엄마가 알려주지 않은 진짜 세상을 알아가고, 그들 덕분에 무사히 클로이에게 닿게 된다. 클로이 앞에 선 지미는 자신의 버블을 찢고 버블 밖으로 나간다. 외부와 접촉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지미는 또 한 번 용기를 내 클로이를 품에 안는다. 놀랍게도 그는 죽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말이 조금 충격적인데, 지미는 이미 4살에 면역력을 회복했고 그의 엄마가 자신의 아들을 이 무서운 세상으로 내보낼 수 없어 버블 안에 가둬 키운 것이었다. 버블 보이가 클로이와 함께 버블 없이 맨몸으로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도 언젠가 지미처럼 이 버블을 깨고 이전처럼 사람들 틈에서 부비적 거리며 살던 때로 돌아가길 바란다. 영화 <버블보이>를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닿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며 경각심을 다졌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57일 차 _ 코로나, 보이지 않는 버블 안에 갇힌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