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그때의 내가 답이 될 거예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은 이랬다. 나무문, 나무 바닥,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알록달록 한 교실. 마치 작은 숲 같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역시 교실 뒷 벽의 게시판이었다. 벽면 전체가 초록색 부직포로 덮여있고, 그 위엔 색색깔의 종이 접기와 포도송이 모양의 칭찬 스티커 표가 줄지어 압정으로 콱 박혀있었다. 종이접기 위엔 이름과 장래희망을 적어두었다. 1학년 때엔 종이접기 위에 간호사라 적었던 친구가 2학년 땐 선생님이 되고, 3학년 땐 소방관이었던 친구가 4학년 땐 국무총리가 되었다. 아이들의 꿈은 늘 갈대의 마음같이 이 직업 저 직업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에서 내 종이 접기엔 심지 굳은 나무처럼 늘 같은 활자가 올랐다. ‘화가’
내 나이 열셋, 초등학교 6학년 일 때 MBC 에선 <러브하우스>라는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사연을 받아 무료로 집을 고쳐주는 컨셉이었는데, 난 그 프로그램에 나온 인테리어 디자이너 남궁선을 보고 확실히 꿈을 정했다. ‘나도 멋진 여성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어야지.’ 화가였던 내 꿈이, 집을 그리는 화가로 확실해진 순간이었다. 건축, 인테리어 분야엔 여성 실무자가 드문 때였고, 나중에 나와 같은 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니, 나와 같은 계기로 디자이너를 꿈꾸게 된 내 또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부모님에게 반년을 졸라서 미대 입시를 시작했다. 친구들이 성적에 맞춰 대학교 과를 고를 때에도 난 인테리어 관련 학과만 바라봤다. 이미 오래전에 진로를 정해두었기에, 학창 시절의 내겐 진로 고민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진로 고민으로 매일 머리를 싸매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본인이 하고 싶은 걸 모르는 거지? 어떻게 꿈이 없을 수가 있지?’ 하고.
꿈에 그리던 미대생이 되고 딱 1년은 좋았다. 3년간 매일같이 똑같은 그림을 그리던 학원과 달리, 대학은 과제에도 창의성을 뽐낼 수 있는 곳이었기에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으며, 학교가 끝나면 어깨에 화구통을 매고 핫한 홍대 앞 거리를 거닐며 술을 마시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홍대생은 아니었다. 홍대 미대생이고 싶은 그냥 미대생이었다···. 그런데 점점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이 일이 내 밥은 아닌 것 같은 쎄한 느낌이 들었다. 무시했다. 그 사이에 어떤 친구는 더 좋은 학교로 편입을 했고, 어떤 친구는 자퇴를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미용을 준비했으며, 어떤 선배는 학교를 다니면서 그래픽 스튜디오를 차렸다. 나 역시 처음엔 설계 일이 아닌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어쨌든 머지않아 공간 디자인 회사에서 실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두 달을 거쳐 첫 프로젝트가 완공되고, 내가 디자인 한 공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그다지 성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느꼈다. ‘아, 이건 정말로 내 밥이 아닌가 본데? 나 이제 어떡하지?’ 그때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진로 고민을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어떤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대학에 들어간 지 며칠이 채 안 된 신입생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나이 많은 전공 교수님이 우리를 모아 두고 훈계 96%의 오리엔테이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교수님은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 다 나중에 설계 일 하고 있을 거 같지? 이제 4년 뒤에 실무 하는 사람은 여기 중에서 딱 3명 남을 거다.”
당시 미대생 뽕에 차 있던 우리는, “야, 뭐야·· 우리한테 굳이 왜 저런 말을 하시는 거야? 난 이 일 꼭 할 건데. 괜히 사기 떨어지게 말이야.” 하고 몰래 수군거렸다. 그땐 내가 그 3명 안에 들을 줄 알았는데, 학생 때부터 난 이미 핸들이 틀어진 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던 거다. 마침내 시동을 걸 때가 되어, 미리 생각해뒀던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데, 액셀을 밟고 달려가는 것도 모자랄 시간에 목적지 아닌 모르는 길을 뱅뱅 도는 거다. 나는 곧 브레이크를 밟아, 목적지를 잃어버린 차를 멈춰 세웠다. 몇 개월간 핸들에 고개만 처박은 채 시동 걸 용기를 못 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나보다 더 큰 어른들은 차창을 두드리고 내게 말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을요. 아주 사소한 것이어도 좋아요. 어린 시절의 내가 답을 찾아 줄 거예요.”
그동안 짧은 인생을 살며 경험한 것, 내가 가진 것의 틀에 갇혀, 늘 나의 가능성을 스스로 재단하던 내겐 발상의 전환적인 말이었다. 돈 걱정, 시간 걱정 없던 어린 시절 가장 순수하게 좋아했던, 잘했던 일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다른 친구들은 구분하지 못하는 비슷한 색깔들을 구분했다. 친구들은 나 몰래 종이에다가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까만색 볼펜으로 마구 칠해 보이지 않게 덮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어느 색이 숨어있냐 내게 물었다. 쉬웠다. 검은색으로 덮여도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특유의 농도가 눈에 보였다. 내가 정답을 맞히면, 친구들은 호들갑을 떨며 놀랐다.
감각이 예민한 아이였다. 냄새를 잘 맡았다. 하굣길에 어느 집 부엌 창문에서 퍼져 나오는 저녁 짓는 냄새를 맡고 그 집의 메인 메뉴를 읊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그 냄새를 맡았다.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아서 흙과도 친했다. 자연물을 밟고 만지고 노는 것 역시 좋아했다. 겨울이면 지붕에 맺힌 고드름을 떼어 언니와 동생과 챙챙 거리며 칼싸움을 했다.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화가를 꿈꾸던 유치원생 때엔 텔레비전 앞에 누워 만화를 보며 만화 속 캐릭터를 하얀 도화지에다가 옮겨 그렸다. 토끼가 주인공인 어느 만화를 보면서 토끼의 부들거리는 털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토끼를 빠르게 관찰해서 그려야 했다. 그림이 다 완성되면 늘 엄마에게 달려가 엎드려 절 받기로 칭찬을 받았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다. 친구들 별명 지어주는 게 내 특기였는데, 어느 날 학원에서 만난 친구가 본인에게도 별명을 지어달라 청했다. 부끄러우면 금세 얼굴이 빨개지는 그 친구에게 유치하지만 홍당무라 별명 지어줬다. 그 친구는 꽤 마음에 들어했고, 우연되게도 친구의 성은 ‘홍’씨였다. 이렇게 관찰한 것들을 주제로 백일장에서 글을 써 늘 상을 받았다. 선생님들은 내게 표현력이 좋다고 했다.
‘잠깐, 어린이라면 보통 이렇게 노는 것쯤은 모두가 좋아하고, 이런 관찰력쯤도 있잖아?’ 어린 시절의 내게 푹 빠져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쓴 일기장을 꺼내어 펼쳤다. 행복하다, 편안하다, 기분 좋다 같은 말이 많이 보이는 날을 찾았다.
하루에 산책만 3차로 달린 날, 한 손엔 연인의 손을, 남은 한 손엔 뜨거운 붕어빵을 장갑 낀 손으로 잡고, 뽀드득 거리는 눈을 밟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말을 내뱉으며 생태 공원을 산책한 날. 유럽 여행에서 동행하던 언니와 산책을 하다가 내가 어느 건물의 천장에 달린 작품들을 발견하고, 길가의 소화전에 그려진 그래픽을 발견하며 감상에 빠진 날, 그런 내게 언니가 “선영 씨는 역시 디자인을 해서 그런가, 관찰력이 정말 좋네요. 난 그게 있는지도 몰랐는데-”라 말한 날이 그랬다.
현재의 나 역시 감각이 예민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나 그대로였고, 나의 이런 기질이 돈과 시간을 쫒던 일상에 덮여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지금도 난 어린아이처럼,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을 그 물성 그대로로 인지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해한다. ‘어? 눈이다. 뽀드득- 눈은 밟으면 재밌는 소리가 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꼭 팥빙수 얼음 같네. 오늘 구름은 꼭 카푸치노에 띄어진 거품 같아. 카푸치노 안에 들어와서 거품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야’ 하면서.
그래서 장래희망을 다시 정했다. 내 장래희망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사는 것.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바라보며 관찰하다가, 어느 날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가 관찰한 무언가를 그에게 보여주어 그가 잠시나마 어린 시절의 청량한 마음을 되찾게 하는 것. 앞으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걱정이 생기고, 나이가 들어 겁이 많아진대도 이 마음만은 영원하길 바라며.
뭐 장래희망이 꼭 직업이 되거나, 돈과 관련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8일 차 _ 장래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