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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r 19. 2021

낯선 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삶

1화. 사는 동안 행복한 일만 있길 바라요

신정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화성행궁으로 혼자 운동 겸 마실을 나갔다.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비가 곧 쏟아질 것만 같았다. 흐린 날이지만 온도는 따뜻했다. 차분한 바람을 맞으며 오르락내리락 성곽길을 걸었다. 긴 계단을 내려가면 절이 하나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다. 우리는 법당 앞 마루에 앉아 비를 구경하기도, 풍등 소리를 들으며 한여름의 더위를 피하기도, 하얀 눈밭에서 뛰어노는 아기 절 강아지 들을 보고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기도 했다. 법당 안의 누군가에게 소원을 빌기 위함 보단, 그저 이렇게 앉아 잠시라도 쉬면 걱정이 싹 사라지는 것만 같아 좋았다.


‘교회 오빠는 있는데, 왜 절 오빠는 없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절에선 젊은이를 찾기 힘들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교복을 입은 우리가 절 대문만 넘어도, 절 안의 스님과 보살님들은 우리에게 ‘아니 젊은이가 어찌 이곳에, 기특하여라’ 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을 걸곤 했다.




그날도 ‘새소리나 좀 들으면서 쉬다가 갈까’하고 절에 들어갔다. 절 마당 근처에 있는 석탑을 보니 내 기도가 필요할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 양 손가락을 포개어 주먹 쥐듯 붙잡고 목례를 했다. ‘ —— 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는 사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나를 향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또 젊은이가 신기한 누군가겠지’ 생각하며 개의치 않고 하던 기도를 마저 했다. 기도를 끝내고 돌아서니 몸집이 작고 얼굴이 반지르르한 어느 스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기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저 멀찍이 서서 기다린 것이었다.


난 합장을 한 자세로 스님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학생, 기도하는 방법 알아요?”


“음 아니요·· 그냥 혼자 해봤어요.”


“자, 거기에 서서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먼저 원하는 것을 속으로 말해요. 그리고 석탑을 오른쪽에 끼고 한 바퀴 돌아요. 그다음엔 석탑에 반배를 하고. 이렇게 세~번~반복하면 돼요.”


스님이 일러준 대로 다시 기도를 했다. 그가 지켜보고 있기에 열심히 해야 했다. 그의 말을 조금은 흘려들은 난 역시 그가 말한 것과 정확히 반대로 석탑을 돌았고, 스님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고대로 다시 일러주었다. 석탑을 제대로 세 바퀴 돈 후, 스님이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그는 어딘가로 가고 없었다. ‘축지법을 썼나? 분명 방금 전까지도 여기에 계셨는데···.’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니 스님이 법당 안에서 헐레벌떡 나왔다. 급히 나오면서도 고무신은 반듯하게 신었다. 그의 작고 두툼한 손에는 손바닥만 한 책 두 권이 소중하게 들려 있었다.


“자, 이거는 달력이고, 이거는 여기 주지스님이 직접 쓰신 책. 마음에 걱정이 있을 땐 이걸 펼쳐서 봐요. 여기 좋은 말이 참 많으니-”

그는 석탑 앞에 혼자 가만히 서서 기도를 하는 젊은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나 보다.


“와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럼~ 가져가서 봐요. 근데,, 학생인가?”


“아 아뇨, 성인이에요. 일하고 있어요~”


“오 그래. 어떤 일을 하는지?”


“아, 글 쓰는 일을 하고 있어요.”

에디터로 일 했으니 글 쓰는 일은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내 글로 먹고살아 본 적은 없으니 틀린 대답 같기도 하고, 대답을 하면서도 조금 찔렸다. 그냥 ‘글’이라는 문학. 예술 분야 특유의 지적인 이미지로 나를 포장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이고 그래요? 문학에 소질이 있나 보네-!!”


“아.. 작가는 아니고요. 회사에서 상품 소개 글을 쓰거나 잡지에 글을 싣기도 하고··· 그런 일을 했어요.”


“어 그래요? 아주 멋있는 일을 하는구먼.”


“(웃음)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 잘하지는 못하는 일인데, 잘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요 ~~~~~~~~~~”

그는 이어서 내게 노력하면 된다, 하다가 잘 안 풀리더라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동안 하고 있던 걱정이 내 눈빛에도 띄워져 있었는지, 그는 내 걱정을 누그러트리는 말만 내뱉었다.


그렇게 스님과 석탑 앞에 가만히 서서 대화인 듯 심리 상담 같은 대화를 5분 정도 했다. 이어서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 멋쩍은 듯 뒤돌아섰다.

 “사는 동안 행복한 일만 있길 빌게요.”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의 행복과 평안을 빌어주는 것에 가장 익숙할 것 같은 사람인 스님이, 내게 행복을 빌어주고 주고 저리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그의 말이 더 진심으로 와 닿았다.


별안간 낯선 이가 불어넣은 온기로 마음이 데워진 나는 마음이 벅차 어쩔 줄을 몰랐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스님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반대편으로 걸어가면서도 내게로 몇 번이나 몸을 돌렸다.


“근데~ 정말 어려 보여서 애기인 줄 알았는데~”

기특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나이가 무척 궁금한 것 같았다.


“아 저, 스물아홉 살이에요. 생각보다 많죠~?”


“어? 아이고~ 그래요. 좋은 하루 보내요~”

그의 반응을 본 난, 기분이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미묘한 느낌이었다···.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스님!”




절을 돌아 나와서 집으로 가는 내내 나도 모르게 양 볼에 보조개가 쏙 피었다. 스님에게 받은 달력엔 달마다 그 달에 피는 야생화 사진이 한 면 가득 걸려있고, 주지스님이 썼다는 책엔 정말이지 나쁜 말이라곤 단 한 마디도 없었다. 보고 있던 달력과 책을 접고, 생각했다. ‘나도 낯선 이에게 아무 조건 없이 행복을 빌어준 적이 있었나? 바로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없는 것 같아. 나도 언젠가 그럴 수 있게 될까?’ 하고.



P.S 너무도 아름다운 행궁동의 풍경을 함께 보여드리고자, 사진을 함께 올린다. 오늘 찍어 온 싱싱한(?) 사진이다.

화성행궁과도 이어지는 성곽길
성곽길 곳곳에 세워진 깃발이 바람의 세기를 알려준다
마실 나온 동네 할아버지께 '저 문은 이름이 무엇이냐'여쭤보니, 화서문의 뒷모습이라고.. 익숙한 동네에서도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새로움을 만나게 된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19일 차 _ 낯선 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삶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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