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내 마음의 그릇이 얼마나 자라야 그의 마음도 담을 수가 있을까
바로 전 글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따로 읽어도 무방하지만, 전 글을 먼저 읽고 오시길 추천해요 :)
내게는 고질적인 기질이 하나 있다. 남을 100% 믿지 않는 것. 엄청 믿었던 누군가에게 큰돈을 사기당하거나, 배신을 당한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믿지 못할까. 어차피 떼일 돈도 없는걸. 잔정이 많은 데 비해 마음이 좁은 탓이었다. 겉으론 티가 잘 나지 않지만 난 사물과 사람에게 쉽게 정이 든다. 어쩌다 내가 정이 든 상대가 나의 마음과는 크기가 같지 않다고 느낄 때면 혼자서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론 늘 ‘아 얘한텐 내가 85인 거 같네, 그럼 나도 85 정도만 줘야지.’ 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셈을 했다.
연인에게도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널 100% 믿지 않아. 항상 10% 정도는 남겨둬. 널 의심한다는 게 아니고, 나중에 만약 내가 상처 받게 될 일이 있을 때 그때 덜 마음 아프려고..” 듣는 이에겐 ‘뭐? 이런 말을 굳이 왜 하는 거지?’하는 생각만 들게 할 만한 헛소리를 기어코 내뱉는 나와 8년째, 그것도 8년 동안 내 마음에 작은 생채기 하나 안 내며 함께한 그가 바로 부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조금이라도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온전히 믿지 않았던 거다. 누군가는 이런 내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서 그런 거 아냐?’ 할 수 있겠지만, 난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나도 안다.
타인에게 무언갈 주는 것 역시 어색하기만 했다. 때문에 아무런 대가 없이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의 마음도 의심했다.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도와줄 수가 있어? 말로써 행복을 빌어주는 건 돈이나 힘이 들지 않아 좀 더 쉬울 수 있다 해도 그게 과연 진심일까?’ 그것은 위선이며, 어쩌면 본인도 모르게 본인의 속마음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쁜 마음’이라는 포장지로 감싸 내보인 것일 뿐, 내용물은 겉모습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내게 행복을 빌어주는 스님의 눈빛에서 느꼈다. 말을 툭 던지고 부끄러운 미소를 보이며 어색하게 뒤돌아서는 어른의 모습을 보고 배웠다. 예쁜 말도, 상대의 마음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예뻐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세상의 예쁜 말과 이유 없는 배려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나의 마음의 그릇이 너무도 작았음을.
간장 종지만 한 마음을 갖고 살던 나는 내 그릇에 흘러넘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의 마음을 얻으면서도 그릇을 넓힐 생각은커녕, 그들의 마음을 내 작은 저울에 맞추기 위해 맞지도 않는 셈을 했던 거다. 감당하지 못할 양을 담아 고장나버린 저울의 추를 보고, 내 작은 저울에 눈대중으로 나마 기준을 맞춰 ‘얘는 90, 쟤는 70’ 하면서, 작은 마음에 상처가 날까 봐···. 작은 그릇에 한번 흠집이 나면 치명적이지만, 큰 그릇은 작은 흠집 몇 번 난다고 해서 그릇이 깨져버리거나 못 쓰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보통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의 스님처럼 그도 세상만사를 다 겪고 득도한 자만의 차분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면, 나도 이런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누군가의 평안과 행복을 빌어주는 게 그 누구보다 가장 익숙할 것만 같은 사람에게서, 오히려 마음을 드러내고 부끄러워하는 일곱 살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그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어린아이 같은 스님의 모습 덕분에 그의 마음이 의심 많은 내게도 온전히 닿았다.
처음 본 내게 “사는 동안 행복한 일만 있길 바라요.” 라 말한 스님은, 내게 한동안 그 말을 떠올리며 느낄 행복을 선물한 것은 물론, 내 마음의 그릇까지 넓혀 주었다.
덕분에 나는 이전엔 내 그릇에서 흘러넘쳐 버리던 누군가의 소중한 마음들을 그릇에 잘 담아, 그것을 양분으로 먹고 자랄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아무 조건 없이 내게 행복을 빌어준 그의 마음은 넓어진 내 그릇에 담기에도 너무나 큰 마음이었다. 내 마음의 그릇이 얼마나 더 자라야 그의 마음도 담을 수가 있을까?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0일 차 _ 낯선 이의 행복을 빌어주는 삶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