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장의 취향과 적당한 단호함
우리는 어느 호숫가 근처의 전통 찻집에 들렀다. 골목의 끝에 있는 찻집은, 마치 산이 그곳을 뒤에서 안은 듯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까마귀 울음과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한적한 곳. ‘아, 여기다.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
중정이 있는 미음자 구조의 한옥이다. 중정에는 다육 식물이 담긴 화분과 도자기로 만든 작은 연못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식물 종류가 어림 풋이 30가지는 넘는데, 시든 이파리 하나 없이 모두 생기가 돈다. 중정 뒤론 안채가 보인다. 우리는 중년의 남자로 보이는 주인장의 안내를 따라 안채로 향했다. 신발을 벗고 마루를 디디고 올라 미닫이로 된 창호문을 열었다. 무겁고 뻑뻑했다. 문에서 덜커덩 소리가 크게 났다.
우리는 주인이 안내한 자리로 들어갔다. 2m는 되어 보이는 기다란 원목 테이블이 있는 문가의 가장 안쪽 자리. 오래된 장식장과 큰 화분 몇 개가 벽 앞을 그득하게 채우고 있다. 공간을 구경하느라 천천히 걸음 하는 내 두발이 닿은 노란색 장판에선 후끈한 온기가 일었다. “오 - 따뜻해. 좋다-” 두툼한 방석을 치우고 맨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 방문 당시엔 빈자리 없이 손님이 가득했는데도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 소리를 낮춰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일요일 오후 여섯 시에 다시 찾은 찻집엔 주인을 빼곤 우리와 젊은 커플 한 쌍뿐이었다.
“어? 근데 여기 원래 이렇게나 조용했었나?”
“그러게, 숨 쉬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아.”
“아, 노래가 없네. 지난번에도 노래 안 나왔어?”
카페에 손님이 가득 차도, 조용할 수 있었던 비법을 알았다.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벽면에 ‘정숙’을 채근하는 말을 써 붙이거나,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는 대신, 조용히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버린 것. 아예 소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조용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공간 일지라도 사람이 많이 모이면 소란스러워지고, 가게에서 틀어놓은 노래가 그 소리와 마구잡이로 버물어지면서 소음이 되곤 한다. 그 사이에 목소리 큰 누군가의 말소리라도 추가되면 아주 난국이다.
그럼, 다른 공간에선 왜 이곳처럼 하지 않았을까? 인테리어를 통한 시각적 감상과 식음료의 맛에서 느끼는 미각의 자극뿐 아니라, 공간과 어우러지는 음악을 통한 청각적 자극 역시 공간의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요소이니까. 주인장 특유의 센스 있는 음악 선정과 퀄리티 높은 음질로 손님을 끌어들이는 공간도 있을 정도로, 상업 공간과 BGM이란 뗄 수 없으니까.
이곳에서 과감히 소리를 걷어낼 수 있던 건, 아마도 다른 힘이 있기 때문일 거라 느꼈다. 이곳은 소리를 차단한 대신 다른 감각에 집중하게 한다. 겨울철이면 엉덩이가 녹도록 온돌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두는 것, 테이블마다 중간에 창호문으로 된 낮은 파티션을 두어 손님들끼리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적당한 벽을 세워 두는 것. 덕분에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는 이상, 다른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적당한 독립성 덕분에 편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가 이 파티션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가벼운 중압감이 느껴진다. 공간 안의 모두가 보이지 않는 서로를 배려하며, 모두가 들어도 좋을, 예쁜 말로만 대화를 하게 된다. 그 차분하고 무해한 말소리가 공기 중에 섞여 나른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모든 자리마다 보이는 풍경, 테이블의 모양도 다르다. 통창 밖으로 돌담과 풀이 보이는 자리엔 옹이가 그대로 있는 긴 나무 테이블을, 어느 자리엔 동그랗고 묵직한 호두나무 테이블을, 작은 문이 있는 문가엔 한지로 칠해진 벽면에 두 명이 어깨를 붙이고 등을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배치해 두었다. 아직 본인의 의지로 소리 낮추는 것이 힘들 어린이 손님을 위한 가족 별실까지.
난 이런 공간이 좋다. 적당히 힘이 있는 공간. 각기 다른 이들이 특유의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 이내 흡수되는 공간. 주인의 취향과 의도가 온전히 녹아있으면서, 주인의 적극적인 개입은 없는 공간. 그런 공간에 있을 때면, 취향이 짙은 누군가의 집에서 주인 없는 시간을 마음껏 즐기는 자유로운 손님이 된 것만 같다.
이런 공간에선 이 분위기를 따르지 않는 손님은 곧 소음이 된다. 공간의 분위기는 안에 들어와 보지 않으면 100퍼센트 유추하긴 힘들기 때문에, 간혹 낙동강 오리알 같은 손님이 생기기도 하는 거겠지.
문에서 덜커덩 소리가 또 한 번 크게 났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면서도 한 명은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난 그들에게 애써 시선을 두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고 있음만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야, 나 지금 카페에 왔는데, 쉿!! 아니 나 존나 당황스럽네.” “야 여기서 노래 틀으면 안 되겠지? 이런 데에선 전통 주점을 해야지, 파전이랑 막걸리를 팔던가.” “뭐라고? 아 미친~ 여기 진짜 존나 당황스럽네”
그들은 기어코 본인의 핸드폰으로 팝송을 틀어 놓았고, 그 소리는 파티션 두 개를 넘어 우리에게도 전해졌다. 삼십 초에 한 번씩 비속어를 내뱉는 그들의 음성을 들으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냥 나가주라..’ 따뜻한 온돌 바닥에 엉덩이를 지지며, 온몸이 녹은 엿가락처럼 천천히 늘어지고 있는 두 커플과 달리, 그들의 엉덩이는 부뚜막에 올라앉은 송아지처럼 들썩였다. 그런 그들도 찻집 마감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엉덩이가 조금씩 차분히 내려앉았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25일 차 _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상업 공간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