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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Mar 31. 2021

여행의 냄새

누구나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이 다르더라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은 낯선 도시로의 여행.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여행을 기억하려 한다.


P 가 말했다.

“머무는 도시에서 도시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향수를 사서 여행 내내 그걸 뿌리고 다녀. 그러면 어느 날 그 향을 맡을 때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거기에 다시 가 있는 느낌이야.”


그 옆의 Y 가 말했다.

“난 기념품! 마그넷이나 그 지역에서 유명한 초콜릿? 그리고 맘에 드는 풍경은 직접 그림으로 그려와.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그 풍경을 집중해서 관찰하다 보니까, 나중에 더 기억이 잘 나는 것 같아.”


K 도 말했다.

“음··· 난 그냥 걸어 다니면서 봤던 풍경. 내가 걷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걸으면서 본 풍경이 가장 기억에 잘 남는 것 같아.”


난 어떨까? 생각했다. ‘마그넷이나 스노우볼, 손수건 같은 기념품은 꼭 사야지. 피렌체에서는 두오모 성당이랑 색이 같은 민트색 니트원피스를 사 왔고, 오사카의 오래된 거리에 있는 100엔 구제 샵에선 친구랑 크롭 니트를 한 벌씩 샀고, 도쿄에선 갓 구운 빵처럼 생긴 가죽 신발도 샀었네. 여행지에서 사 온 옷을 입을 땐 나도 모르게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나는 것 같아. 그 구제 샵이랑 가죽 신발 가게에선 쾌쾌한 창고 냄새가 났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도, 그때의 매캐한 냄새가 어딘가에서 나는 느낌이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인 대만 지우펀의 어느 좁은 골목에서 풍기던 취두부 냄새, 취두부 냄새를 피하기 위해 두 손으로 콱 틀어막은 코 틈으로 살짝 들어오던 어느 만두 가게의 갓 찐만두 냄새. 어느 끝겨울 스위스 인터라켄에선 길을 잃어 의도치 않은 하이킹을 하다가 만난 눈밭에서, 쏟아지는 콧물 틈으로 들어오던 녹은 눈 냄새. 눈밭을 지나 만난 에메랄드빛의 작은 하천에서 나던 물비린내. 프라하 하벨 마켓에서 나던 뜨로딜로(프라하 전통 빵)이 타는 매캐한 연기 냄새.


물건 사는 것, 그림 그리는 것, 사진 찍는 것 모두 좋아하는 내게 여행의 기억을 가장 잘 떠올리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여행지에서 풍기는 날것 그대로의 냄새였다. 남들은 못 맡는 냄새를 잘 맡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고, 후각이 너무도 예민한 탓이다. 인공적인 향, 세균(먼지) 냄새 등에 극도로 예민하고,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아주 조금 냄새를 잘 맡는다. 냄새에 예민하기 때문에, 후각의 자극은 곧 편두통으로 이어지곤 한다. 여행지에서도 내 코에 들어와 기억으로까지 남았다는 건, 그 냄새의 주인공은 분명 내가 싫어하는 냄새였을 거다. 하지만 뭐, 그 덕분에 여행을 잘 기억할 수 있는 거다.


오늘 난 제주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엔 제주의 향기를 잘 담아와야지. 아무래도 봄꽃 가득한 도로를 드라이브할 때 차창으로 들어온 냄새 보단, 회를 포장하기 위해 간 수산시장에서 난 생선 냄새로 이번 여행을 더 기억하겠지만, 아무렴 어때, 여행지에서의 순간순간을 잘 담아올 수만 있다면 내 두 콧구멍쯤이야 기쁘게 내주리라.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31일 차 _ 여행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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