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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순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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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04. 2021

비바람이 몰아치는 제주 숲길에서

사려니숲길을 거닐다

비 오는 날 숲에 가는 걸 좋아한다. 빗방울은 숲에 양분이 된다. 하늘에서 마구 쏟아지는 양분을, 풀과 흙은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먹는다. 한껏 촉촉해진 풀과 흙이 모인 숲에선 자연 고유의 색감과 냄새가 더욱 진해진다. 물을 배불리 먹은 나무들이 뱉어낸 숨 냄새, 나무와 풀을 타고 떨어진 물이 토독 토독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흙들이 제 몸에 닿은 물을 뻐끔뻐끔 빨아먹는 소리. 그런 풍경 속에서 습도 높은 바람을 타고 유영하며 자기들만의 언어로 대화하는 새들의 수다 소리.


이미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숲이지만, 비가 온 후에야 숲 속에 다른 생명들도 살아있다는 사실이 온전히 내게도 닿는다. 비 오는 날 숲 속 생명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눈도 못 뜬 새끼 강아지가 온 힘을 다해 어미의 젖을 빠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든 행동의 이유는 생명의 연장을 위한 것뿐인, 순수하고 무해한 존재들. 그런 생명체가 모인 숲에선 생동감이 넘친다. 그 생기를 관찰하는 내 마음에도 금세 활기가 돈다.




오늘 제주엔 비바람이 쳤다. 각자 분홍색, 초록색 우비를 입고, 초록을 머금은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삼나무 길이 빼곡하게 펼쳐진 곳이다. 포토존으로 유명한 데크길과 포장된 길을 지나면 숲길이 나온다. 진흙덩이를 밟고, 물 웅덩이에서 신발을 적셔가며 숲 속을 걸었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가 다시 포장된 길을 걸었다. 50대 어머님들이 길가의 어느 나무들을 감싸고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그들에게선 맑고 높은 웃음소리가 연신 퍼져 나왔다. 웃음의 이유는 허브나무였다. 허브 나무 향기 하나만으로 꺄르르 행복해하는 그들이 귀엽다 생각했다. 그들을 지나 인적이 드문 깊은 곳까지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계속 걸었다.


“여기 저승길 같아. 나태 지옥인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여긴 천국 가는 길이네.”

“··· ”

“아니야, 너무 힘들다. 여긴 저승길 인가 봐.

잘 가, 이번 생에서 함께해줘서 고마웠어···.”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우린, 뻐근한 종아리와 허리를 붙잡고 이런 농담을 하면서도 연신 발을 옮겼다.


인기척이 사라진 곳에선 새들의 잔치가 열렸다. 새들의 세상이었다. ‘여기 완전 새들의 집이네. 아, 원래 숲의 주인은 이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나무 의자에 누웠다. 숲 속의 키 큰 나무들은 다른 나무와 서로 이파리가 닿지 않도록 가지와 잎을 펼친다고 한다. 제 잎이 햇빛의 양분을 온전히 먹고 자라기 위해서 일거다.


의자에 누워 하늘을 봤다. 정말이지 나무들의 이파리가 닿지 않았다. 저 높이에서 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봤다. 그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빗방울들도 보였다. 크고 작은 빗방울이 수직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떨어지는 비를 옆에서 볼 땐, 특유의 속도감 때문에 비가 내려오는 순간을 볼 수가 없었는데, 비의 종착지 가까운 곳에 누워 올려다보니 바람기 없는 겨울날의 눈처럼 정말 천천히 내렸다. 마치 투명한 눈 같았다. 빗방울들이 내 이마와 눈에 토독 토독 떨어졌다. 나도 숲 속의 생명이 된 느낌이었다.


그렇게 비 먹은 숲을 오감으로 즐기며 세 시간을 걸었다. 내내 안온한 마음이 들었다.


신기한 모양의 이파리. 이렇게 돌돌 말려있다가 좀 자라면 펴지는 듯 했다.
행복했다. 자연이 된 느낌을 즐겼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34일 차 _ 비 오는 제주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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