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그림을 그렸다
내겐 고질병이 하나 있다. 끈기 부족. 무언가 시작에서부터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관둬버린다. 특히 그림이나 손으로 하는 작업을 할 땐 더욱 그렇다. 종종 갑자기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내 방엔 이미 손 닿는 곳에 드로잉북, 색연필, 72색 마카, 목탄, 수채화 심지어 유화까지 마련되어 있다.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그릴 때마다 처음 그린 선 몇 개, 색 조합 등이 늘 맘에 안 들어, 그리던 그림 위에 신경질적으로 낙서를 하고 스케치북을 덮어버린다. 아빠 생일선물로 아빠의 20살 시절 모습을 그려주겠다고 다짐하고서도 밑그림만 그리고 말았다.
혹자는 이런 날 완벽주의 성향인 줄로 알 수 있겠지만, 그저 내 머리는 입시, 미대생 시절 만들었던 결과물을 생각하는데, 지금 손은 그때만큼 못 따라가니 금방 의지를 잃고 마는 것이다.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취미로 그림을 계속하고 싶어서 재료를 다 남겨두고 새로 사기도 해놓고는 오히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쩌다 내가 3년간 미대 입시를 했으며,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누군가가 내게 “어? 그럼 그림 잘 그리겠네요. 그림 자주 그려요?” 하고 물으면, 난 조금은 초연한 얼굴로 “그림은··· 입시 끝나고부터 손 떼었는걸요···.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이젠 손이 굳어버렸어요.” 하고 만다.
나와 같은 학원,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닌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손으로 하는 거의 모든 걸 좋아한다. 적성에 딱 맞는 직업도 찾았는데, 바로 학원에서 실내 제도, 드로잉 수업을 하는 수작업반 강사다. 짧은 외출에서도 친구의 가방은 늘 빵빵하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파렛트와 물감, 종이가 항시 들어있다. 여행지에서 걷다가도,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장면이 보이면 손에 물감과 붓, 종이를 끼고 서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 봄날 우리는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잠시 쉴 겸 카페에 들렀는데, 그때도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뒤적거렸다.
“우리 그림 그리자~”
에이드를 빨며 카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나와 다른 친구 앞에도 종이와 붓이 하나씩 차려졌다. 친구는 오렌지 에이드가 담긴 시원한 유리잔을 그렸다. 난 그 옆에서 오렌지 에이드 안에 들어있는 오렌지 조각을 그렸다. 내가 보고 있는 오렌지는 색이 참 탐스럽고 상큼한데, 내 종이 위에 그려지고 있는 오렌지는 탁했다. 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아이씨, 안 해!”
“왜~ 좀 더 해봐.”
“아냐, 맘에 안 들어.”
테이블에 붓을 탕 하고 놓았다. 그런 내게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우린 이제 입시 때처럼은 절대 못 그려. 그땐 누가 뒤에서 총 들고 쫒아온다고 생각하면서 그렸는걸? 그리고 그땐 다 똑같은 구도, 똑같은 스타일로 그렸잖아. 난 지금 그때보다 잘 못 그려도 지금이 훨씬 재밌어. 잘 그리려는 생각 안 하고 내가 그리고 싶은데로 그냥 하니까.”
당시엔 친구의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3년 입시에 그 비싼 미대 등록금까지, 큰돈을 쏟아붓고도 남긴 게 없다는 생각에 그저 부모님에게 너무나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전공과 다른 길을 택한 게 가장···.
3개월 전, 이제 그림과 글을 열심히 해보겠다 다짐하며 일시불 플랙스로 아이패드를 샀다. 집에 이미 미술 재료가 넘치는데 굳이 아이패드를 산 이유는, 그냥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아서. 역시 착각이었다. 아이패드로도 여전히 선 몇 번 그려보다가 또 “아이씨, 안 해. 난 그림 못 그리겠어 이제. 옛날엔 잘했는데···.” 하고 펜슬을 내려놓았다. 그런 내게 연인이 말했다.
“사실 그때도 그림 다운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잖아. 입시를 위해서 그렸던 것뿐이지. 그게 네 스타일도 아니었잖아. 그림을 못 그리면, 못 그리는 매력으로 그리면 되지.”
그 말을 듣고 난 ‘못 그리는 매력이란 뭘까, 못 그린 그림이어도 귀여우면 되는 걸까? 아니면 내 분위기와 딱 맞는 그림체를 찾으면 되는 걸까?’ 하고 고민했다. 이젠 목적을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다운 그림’으로 바꾸니 조금 재밌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종종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조만간 아이펜슬이 아닌 연필이나 붓도 다시 쥐어볼 생각이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46일 차 _ 잘 그린 그림 말고 ‘나다운’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