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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15. 2021

잘 그린 그림 말고 ‘나다운’ 그림

10년 만에 그림을 그렸다

내겐 고질병이 하나 있다. 끈기 부족. 무언가 시작에서부터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관둬버린다. 특히 그림이나 손으로 하는 작업을 할 땐 더욱 그렇다. 종종 갑자기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내 방엔 이미 손 닿는 곳에 드로잉북, 색연필, 72색 마카, 목탄, 수채화 심지어 유화까지 마련되어 있다.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그릴 때마다 처음 그린 선 몇 개, 색 조합 등이 늘 맘에 안 들어, 그리던 그림 위에 신경질적으로 낙서를 하고 스케치북을 덮어버린다. 아빠 생일선물로 아빠의 20살 시절 모습을 그려주겠다고 다짐하고서도 밑그림만 그리고 말았다.


혹자는 이런 날 완벽주의 성향인 줄로 알 수 있겠지만, 그저 내 머리는 입시, 미대생 시절 만들었던 결과물을 생각하는데, 지금 손은 그때만큼 못 따라가니 금방 의지를 잃고 마는 것이다. 스트레스 풀이용으로, 취미로 그림을 계속하고 싶어서 재료를 다 남겨두고 새로 사기도 해놓고는 오히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쩌다 내가 3년간 미대 입시를 했으며,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누군가가 내게 “어? 그럼 그림 잘 그리겠네요. 그림 자주 그려요?” 하고 물으면, 난 조금은 초연한 얼굴로 “그림은··· 입시 끝나고부터 손 떼었는걸요···.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늘 있지만 이젠 손이 굳어버렸어요.” 하고 만다.




나와 같은 학원,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닌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손으로 하는 거의 모든 걸 좋아한다. 적성에 딱 맞는 직업도 찾았는데, 바로 학원에서 실내 제도, 드로잉 수업을 하는 수작업반 강사다. 짧은 외출에서도 친구의 가방은 늘 빵빵하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파렛트와 물감, 종이가 항시 들어있다. 여행지에서 걷다가도,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장면이 보이면 손에 물감과 붓, 종이를 끼고 서서 그림을 그린다.


어느 봄날 우리는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잠시 쉴 겸 카페에 들렀는데, 그때도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뒤적거렸다.


“우리 그림 그리자~”


에이드를 빨며 카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나와 다른 친구 앞에도 종이와 붓이 하나씩 차려졌다. 친구는 오렌지 에이드가 담긴 시원한 유리잔을 그렸다. 난 그 옆에서 오렌지 에이드 안에 들어있는 오렌지 조각을 그렸다. 내가 보고 있는 오렌지는 색이 참 탐스럽고 상큼한데, 내 종이 위에 그려지고 있는 오렌지는 탁했다. 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아이씨, 안 해!”


“왜~ 좀 더 해봐.”


“아냐, 맘에 안 들어.”


테이블에 붓을 탕 하고 놓았다. 그런 내게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우린 이제 입시 때처럼은 절대 못 그려. 그땐 누가 뒤에서 총 들고 쫒아온다고 생각하면서 그렸는걸? 그리고 그땐 다 똑같은 구도, 똑같은 스타일로 그렸잖아. 난 지금 그때보다 잘 못 그려도 지금이 훨씬 재밌어. 잘 그리려는 생각 안 하고 내가 그리고 싶은데로 그냥 하니까.”




당시엔 친구의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3년 입시에 그 비싼 미대 등록금까지, 큰돈을 쏟아붓고도 남긴 게 없다는 생각에 그저 부모님에게 너무나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전공과 다른 길을 택한 게 가장···.


3개월 전, 이제 그림과 글을 열심히 해보겠다 다짐하며 일시불 플랙스로 아이패드를 샀다. 집에 이미 미술 재료가 넘치는데 굳이 아이패드를 산 이유는, 그냥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아서. 역시 착각이었다. 아이패드로도 여전히 선 몇 번 그려보다가 또 “아이씨, 안 해. 난 그림 못 그리겠어 이제. 옛날엔 잘했는데···.” 하고 펜슬을 내려놓았다. 그런 내게 연인이 말했다.


“사실 그때도 그림 다운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잖아. 입시를 위해서 그렸던 것뿐이지. 그게 네 스타일도 아니었잖아. 그림을 못 그리면, 못 그리는 매력으로 그리면 되지.”


 말을 듣고  ‘ 그리는 매력이란 뭘까,  그린 그림이어도 귀여우면 되는 걸까? 아니면  분위기와  맞는 그림체를 찾으면 되는 걸까?’ 하고 고민했다. 이젠 목적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다운 그림으로 바꾸니 조금 재밌어졌다. 그래서 요즘은 종종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린다. 조만간 아이펜슬이 아닌 연필이나 붓도 다시 쥐어볼 생각이다.



내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어렵다.
그래서 일단 도형으로 날 표현해봤다. 굴려지고 있는 저 세모가 나다.
뒹굴거리는 나.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체를 따라, 내 모습을 그려봤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46일 차 _ 잘 그린 그림 말고 ‘나다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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