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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13. 2021

봄날의 가파도, 주연은 청보리일까?

제주 일기

제주의 4월은 비바람과 강풍주의보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흘간 제주를 감싸던 비바람이 떠나자 곧바로 뜨거운 햇살이 찾아왔다. 바다 물결에 윤슬이 빼곡하게 맺힌 어느 날, 우리는 가파도로 향했다. 파도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배의 갑판에 자리를 잡았다. 무게 없는 바닷물이 얼굴로 톡톡 튀었다. 쾌청한 날씨 덕에 한라산 자락도 또렷하게 보였다. 멀어져 가는 산방산과 산방산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한라산 자락을 가만히 바라봤다.


2021.04.06 가파도. 산방산이 꼭 제리뽀 엎어놓은 모양 같다고 생각했다.

가파도엔 눈을 못 뜰 정도의 쨍한 햇볕과 머리카락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센 바람이 일었다. 바람결에 온몸을 맡긴 채 규칙 없이 흔들리며 일광욕을 하는 청보리들처럼,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봄날의 가파도를 즐겼다. 눈이 떠지지 않으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얼굴에 맺힌 햇살을 느끼고, 바람이 등을 마구 밀면 온몸에 힘을 풀고 바람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바다 둘레길에서 마을로 올라가자 너른 청보리밭이 보였다. 그런 청보리밭을 가로지르며 피어난 무꽃 일지 라일락 일지 모를 연보라빛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이름은 ‘갯무꽃이라고 한다) 한참 바라봤다. 봄날의 가파도에선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둥  맑은 하늘도, 윤슬이 밤하늘의 별처럼 한가득 맺힌 푸른 바다도, 청보리 앞에선 조연이 되어버리고 만다고 생각했었다. 


너른 청보리밭, 청보리 사이에 핀 연보라빛 꽃, 바다의 수평선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한 프레임에 담고 싶었다. 그 풍경을 뷰파인더로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제 아무리 아름답게 피어난 청보리라도 따사로운 햇살, 제 주변에서 제 몸과 다른 모양새, 다른 색으로 피어난 생명들 없이도 이리 빛날 수 있었을까?’ 하고. ‘봄날의 가파도’라는 작품의 주연은 보통 청보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조연 인척 힘을 숨긴 무수한 주연들이 있었다.


2021.04.06 가파도
2021.04.06 가파도. 바다 건너의 산방산과 한라산까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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