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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영 Apr 23. 2021

가짜 같은 세상에서 찾은 진짜 행복

공원에서

이제 공기에도 온도가 생겼다. 낮에는 따뜻하고 습도 높은 바람이 인다. 연인과 손을 잡고 공원을 걸었다. 그러다 동그란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공원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연을 날리는 할아버지들, 강아지와 산책 나온 젊은 여자들, 친구들과 수다에 한창인 학생들을. 이렇게 모든 게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서, 그 안의 풍경을 바라볼 때면 그곳의 주인이 된 느낌이 든다. 공원 풍경을 내려다보니, 역시 공원의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선형 돌계단 위 길 끝에서 끝까지, 두 마리 개와 함께 같은 길 위만 별다른 표정 없이 연신 걷는 중년의 여자, 구김 없는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공원 한가운데 잔디밭에 서서 독수리 모양 연을 하늘로 올렸다가 연이 센 바람을 맞아 어딘가로 툭, 떨어지면 천천히 얼레를 감았다가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는 할아버지, 돌계단에 둘, 셋씩 쪼르르 모여 앉아 긴 시간 수다를 떠는 사람들. 내 프레임 안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영화 <트루먼쇼>가 떠올랐다.


트루먼만을 위해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본인도 모르게 완벽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트루먼처럼, 오늘의 따뜻한 공기, 잔잔한 바람, 나와 어깨를 붙이고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이 사람, 공원 속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 모두 마치 나를 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풍경 속에서도 오직 자신과 얇은 실 한 올로 연결된 채 하늘을 나는 연에게만 시선을 두던 할아버지, 벤치에 곧은 자세로 앉아 줄 이어폰을 끼고 생각에 잠긴 듯 부동의 자세로 한 곳에만 시선을 두던 할아버지, 반려인을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 그들 모두 나처럼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을까? 어땠을까? 나와 같은 온도, 바람, 소리 속에 있던 그들의 생각도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느낀 이유는 적어도 공원에서의 순간만큼은 짜여진 극본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트루먼쇼에서도 트루먼을 감싸는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흘러가니까. 적어도 트루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밖을 궁금해하기 전까진. 가짜 세상에서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던 트루먼은 결국 진짜 행복을 찾아 가짜 세상 밖으로 떠나가지만, 어느 것도 짜여지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나는, 트루먼쇼 속 가짜 세상처럼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큼 완벽하게 흘러갈 때, 큰 어려움과 슬픔 따위 없이 잔잔하게만 흘러갈 때 진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공원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생각나는 말들을 서로에게 줄줄이 꺼내어 놓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손을 잡고 동네길을 걸었다. 작은 술집에 들어가 각각 하이볼과 맥주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랬다. 적당한 취기와 밤이라고 다시 제법 시원해진 공기를 느끼며 또 다른 공원을 걸었다. 트루먼쇼 속 가짜 세상처럼, 완벽한 하루였다.




|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 53일 차 _ 가짜 같은 세상에서 찾은 진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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