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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 욱 Jun 10. 2021

[독후감]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

잔꾀를 내 볼 요량이었다. 이미 내 책장에는 유시민, 강원국, 윤태영 등 난다긴다 하는 전문가들이 쓴 글쓰기와 말하기, 소통에 관한 저서들이 즐비했다. 여기에 전직 아나운서의 말하기 비법을 담은(것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을 더 얹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낭비로 여겨졌다.


그래서 생각해낸 잔꾀는 인터넷에 떠도는 블로그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정보를 적당히 짜집기 해 '읽은척 독후감'을 쓰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말 잘하고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터라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유정아, 샘앤파커스)의 목차를 훑어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목차의 문구들이 주는 울림 때문이다. 여느 자기계발서나 인생지침서처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때로는 독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당신은 연민하는가 공감하는가), 때로는 자신의 경험을 담당하게 풀어놓기도 하면서 (상처가 있는 한 누구나 말더듬이다), 소통과 말하기에 대한 커다란 성찰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기도 한다(그에게서 당신이 본 것, 그것이 곧 당신이다). 이 책은 말하기의 비법을 전수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말하기를 매개로 저자가 독자에게 내미는 손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은이 유정아는 KBS 아나운서 출신으로 노무현 시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학에서 말하기 수업을 하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대통령 연설문을 모니터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잘된 말과 그렇지 않은 말들을 구분한다.


소통이 부족한 대통령의 연설문을 보며 좋을 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듣는 이들과 공감하는 능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감은 일단 판단을 유보한 채 타인의 관점에서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며, 그의 행복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을 때 완성된다.


“대통령은 때로 눈물은 흘릴지언정 제대로 상대의 아픔을 보지 못했다. 상대가 되어보려 애쓰지 못했다. 타인의 관점에서 서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헤어리고, 그의 행복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조직과 제도를 바로잡지 못했다. 소통은 말 뿐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수많은 사람들과의 수많은 대화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몇 년 더 살아봤다고 뭐 그렇게 아는 척을 하느냐”였다. 진심 어린(것 처럼 보이려 애썼던) 조언도, 애정을 다해 시도하는 소통도 결국 공감이라는 끈이 끊어진 뒤에는 그저 ‘늙다리의 꼰대질’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우쳤다. 저자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녹여 “되잖은 조언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 문장으로 만들어냈다.


“조언은 상대가 요청할 때, 그리고 당신이 상대의 처자와 문제를 진심으로 염려할 때만 환영받는다. 앞의 문장은 ‘or’가 아니라 ‘and’로 이어진다. 즉 조언은 자신이 짐심으로 염려하는 상대가 요구할 때만 하라는 것이다. 구하지 않은 것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누군가에게 조언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 ‘나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떠올려봐야 한다. 저자는 말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간의 품격을 높이고 소통의 벽을 허물어 소통의 문을 만들어가는 지혜를 강조한다.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차별점이자 좋은 점은 저자의 경험담을 계기로 자신을 회고하고 성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의 ‘연기’는 잘 벗겨지지 않았다. 우리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의도한 부정직함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역할 연기를 할 뿐 자신이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는 스피치는 청자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개운하지가 않다. 화자의 정직성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다”


‘말’을 다루는 사람답게 책의 문장들은 ‘딱 떨어진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단정하고 정갈하다.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면서도 흥분하지 않고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면서, 읽고 난 뒤 다시 한번 되뇌이게끔 하는 힘이 문장에서 느껴진다. 여자로서는 다소 낮은 음색을 가진 굵은 웨이브 헤어스타일의 커리어우먼이 연상된다.


오만가지 말 잔치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말이 되는 말, 말 같지도 않은 말, 좋은 말, 나쁜 말, 이상한 말들이 유튜브와 팟캐스트로 상징되는 최신의 미디어 트렌드를 타고 흘러다닌다. 수많은 말쟁이들 가운데 진정으로 청자의 입장과 관점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저 다양성을 강조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저 뱉어내는데만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소통을 강조하면서 귀는 닫고 입만 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염된 말들의 향연 가운데서 진정 말다운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으로 추천한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꿈을 좇아 살아오긴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진정한 소통을 하고 있기는 한건지 스스로에게 궁금해졌다. 조물주가 얼굴을 가져가고 세치 혀를 주셨다며 히히덕거렸던 지난 날들이 부끄럽기도 하다. 유정아의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는 말하기 책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가져오는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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