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일은 대개 가벼운 결심으로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들은 머리속을 맴돌고 노트북을 펼치면 뭐든지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하얀 백지위에 커서가 깜빡거리면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다. 머리 속은 복잡한데 손끝은 무겁고, 의미없이 백스페이스만 연신 두드리며 한 글자도 없는 상태. 지금 내 상태가 그렇다. 요즘은 특히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쓸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잃어버린 상태, 이런걸 '라이터스 블록'이라고 하는가보다.
뭐라도 쓴 사람은 그저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럽고 대단해 보인다. 묵직하고 방대한 저작을 손에 쥐고 놓치 못하고 있을때는 마음이 산란해져서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은 이렇게 잘 쓰는데 나는 어쩌면 좋은가 하는 질투와 불안감이 엄습한다. 나는 한 줄도 쓰기 힘든데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이 많은걸까 싶은 자괴와 열패감이 머리속을 마구 휘저어 놓는다.
라이터스 블록은 단순한 창작 활동의 정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자 정체성의 혼란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 잘 쓰고 싶은 욕망과 잘 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뒤엉켜 글을 가로막는다. 이건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과의 어떻게 대화하는지, 인생의 길을 어디로 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문제일지도 모른다.
라이터스 블록은 골프 선수들에게 나타나는 '입스(yips)'와 닮았다. 입스란 선수들이 경기력 저하로 인해 몸이 굳어버리는 상태를 말한다. 골프채를 휘두르려 해도 손이 떨리고, 평소의 자연스러운 스윙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두려움이 몸을 경직시켜 동작 하나하나가 과도하게 인식되는 상황을 뜻한다.
라이터스 블록도 다르지 않다. 평소엔 쉽게 썼던 글이 한순간에 멈춘다. 단어 하나를 적는 데도 무의미한 긴장이 깃들고, 문장은 자기검열에 부서진다. 글쓰기와 골프 스윙은 약간의 무의식적 행위에 가까운데 이 과정이 지나치게 인식되면서 움직임이 가로막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빠졌을 때 다른 이가 쓴 좋은 글을 보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이 사람은 이렇게 잘 쓰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라는 자괴감과 열패감은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가중시킨다. 결국 이 비교와 질투가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내가 가진 고유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잃어버리고, 남의 기준을 좇게 된다. 아,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정말 지금 현재 나의 상태와 너무도 똑같다.
골프에서 입스를 극복하려면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잘 써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이 글을 왜 쓰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글쓰기는 나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멈추고 돌아보기'.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쓰지 않아도 좋다. 나는 글이 안될 때는 말을 한다. 아무나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해서 머리 속의 생각을 일단 끄집어낸다. 정리는 나중 일이다. 완벽한 문장을 쓰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입에서 나오는 단어와 문장을 그냥 끄적여 보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라이터스 블록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듯이 글이 써지지 않는 날들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글쓰기를 꿈꾼다. 그 꿈이야말로 내가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한 줄을 쓴다. 비록 그 한 줄이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더라도, 나는 써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