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기관은 대선후보 여론조사에 문 전 재판관을 포함해야..
살면서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그런 이름도 알게 되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호의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를 쓴 문형배라는 이름이 그렇습니다.
작가 문형배는 대한민국의 전직 헌법재판관(헌재소장 권한대행)입니다. 2019년부터 2025년까지 헌법재판관을 지내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주임판사였습니다. 지난해 12월 3일, 그 말도 안되는 비상계엄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 법률가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며 새로운 생명체를 맞닥뜨리듯, 우리는 비상계엄과 또 한번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위의 순간에 그를 만났습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5개월간의 시끄러운 정국 속에 전국민이 시청한 탄핵심판 선고재판에서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며칠 뒤 퇴임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시민이 되어 오랫동안 소망했던 책을 냈습니다. '호의에 대하여'는 그가 오랫동안 기록했던 일상과 독서의 기록, 그리고 게시판의 흔적을 담았습니다. 그는 법정이 아닌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인생과 세상, 인간에 대해 성찰을 담담하면서도 조금은 성근 문체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법률가 문형배를 널리 알린 건 대통령 탄핵심판이었지만, 글쓴이 문형배는 '손석희의 질문들'이라는 방송을 통해 대중의 인식에 깊이 각인됐다고 생각합니다.
"관용에도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만루에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 인생에도 정면 승부를 걸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처럼 법과 정의의 최전선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의 경험이 묻어나는 많은 어록을 남겼고 특히 진행자인 손석희 앵커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역으로 던지며 승부사의 기질과 서민의 면모를 다양하게 보여줬습니다.
"지금 질문지대로 안 되는게 너무 많아요. 질문이 오면 연습을 해요. 그리고 가지를 칠 거다 이렇게 쫙 준비를 하거든요. 오늘은 벗어난게 너무 많습니다"
"저한테 혹시 뭐 그럼 질문하실 기회를 제가 드려도 됩니다."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신뢰받는 저널리스트 1위시거든요. 근 20년 됩니다. 제 기억에 그렇습니다. 그 비결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아 그건 뭐 제가 말씀드리긴 좀 민망하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질문을 받는 심정이 그렇습니다. 답을 할 수 없는게 많습니다."
"아, 그러니까 이제 다 용서가 되는데요."
한 번쯤 말을 아끼는 대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분명히 밝히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론조사 기관에 부탁드립니다. 다음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는 꼭 문형배 재판관을 넣어주기 바랍니다.
너무도 훌륭한 사람이 책을 냈으니 출판계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선물로 받은 이 책은 이미 14번째 인쇄판입니다. 5만부 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네요. 책 자체가 저의 기대에 조금 못미치기는 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통찰을 기대했는데 한 시민의 소박한 일기와 독서감상문의 모음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호의'가 지금 시대에 필요한 또 다른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호의는 거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건 호의를 이 사회에 베풀라는 겁니다. 이 사회에 베풀면 호의가 축적이 됩니다. 호의가 축적이 되면 어느 순간에 그게 저한테 돌아옵니다. 나는 이 사회의 호의를 베풀었고 이 사회는 나에게 호의를 갚는다 라고 생각하시면 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렇게 한번 바꿔놓고 봐요. 제가 장학금을 받았잖아요. 장학금을 받은 마지막이 86년입니다. 39년 전이에요. 39년 전에 한 행동을 지금 39년 뒤까지 잊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고마워하고 생각날 때마다 이야기하고 또 그걸 실천하려고 노력하잖아요. 한 인간이 타인에게 베푸는 그 호의라는 거는 어마어마한 겁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범죄를 잘 저지르지 않고요."
이 책은 글쓰기와 책내기에 대한 눈높이를 낮춘 면도 있습니다. 역시 책은 무슨 내용을 쓰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람이 쓰는지도 중요합니다. 좋은 글은 거창한 통찰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사람의 솔직함과 겸손함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의에 대하여』 역시 위대한 문장이나 미려한 수사보다, 자신을 낮추고 경험을 진심으로 전하려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졌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이문희 님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