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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Jan 20. 2021

삼청로 30, 미술관 앞

양혜규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프로젝트 응모 편지

삼청로 30, 미술관 앞


봄이 되자 바이러스가 창궐했고 온 세상이 멈춰 섰습니다. 나의 공장 또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텐트와 자전거를 트렁크에 싣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남쪽 해변을 따라 때론 뭍에서 때론 섬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 나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닷새 동안 해변과 숲길을 걷고 달렸다. 텐트와 자전거 그리고 물과 식량을 차에 싣고 떠났다. 사람이 많은 곳은 피했고 잠은 바닷가나 텅 빈 공원에서 잤다. 여정에 노선을 정하지 않았고 남해 바다를 따라 대략의 동선만 머릿속에 그렸다. 아직 길 위의 밤은 추웠다. 온기 없는 밤은 길고 더디게 흘렀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 사람들을 스쳤다. 바닷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은 내게 다가와 함께 자전거를 타자고 했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좁은 동네 구석구석을 내게 소개했다. 혼자 먹는 도다리쑥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예전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대신에 오천 원짜리 왕창국밥에서는 맑고 깊은 맛이 났다. 얇은 텐트는 영하에 가까운 밤공기를 막지 못해 차고 추웠다. 사방 어디에도 작은 조명조차 없는 강의 한가운데에서는 달과 별이 유난히 밝았다. 자고 일어난 텐트 위로 벚꽃잎이 이불처럼 덮였다. 남도의 산과 길에는 온통 벚꽃이 지천으로 피었는데 아직 어두운 숲과 대비되어 더욱 화려했다. 추산의 잘 정돈된 숲길엔 자목련과 동백이 번갈아 피었고 양지꽃과 제비꽃이 앙증맞게 깔렸다. 예정에 없었지만 낙향한 길동무는 나를 반갑게 맞았다. 억대 연봉의 직장을 자의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더 이상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친구의 인생관은 신선했다. 돈벌이가 일시적으로 끊겨 현실도피처럼 길을 떠난 나와는 달랐다. 술과 안주를 곁들여 묵은 얘기들을 나눴고 둘이서 오래도록  산길을 걸었다. 남해 이곳저곳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내게, 자박자박 귀를 적시던 남해바다의 파도소리와 잠든 머리 위로 후드득 바람에 떨어지던 벚꽃잎들의 낙화음만 겨우 남았다. 


초여름엔 상황이 조금 나아졌고 여럿이 함께 무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길이 없는 길을 갔고 긴 시간은 아니지만 배 고장으로 표류를 경험했습니다. 흔치 않은 경험을 했던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늬만 백패커였던 내가 섬에서의 백패킹을 경험했다. 그것도 무인도에서. 사람이 없는 섬에는 전기도 식수도 식량도 없고 약속된 배가 오지 않으면 그곳을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이 없는 대신 밤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들과 처음 보는 새들의 지저귐과 불쑥 파도 위로 솟구치는 상괭이들이 있다.


내내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마도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는 생각들이겠습니다. 이때는 이렇게 정리했는데 생각은 또 바뀌고 나아가겠지요.


- 쉽게 다가온 사람은 그만큼 쉽게 멀어진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너무 밀착된 사람은 한 발쯤 떨어져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서는 편이 좋다,
- 오래 사귄 친구는 관계가 쉽게 끝나지 않지만 늘 가까이 두기 어렵다. 잠시 혹은 길게 쉬더라도 다시 만나면 어제 본 듯 어색함이 없기 마련이다.
- 누군가 모임에도 생로병사가 있다고 했다. 요즘 부쩍 그걸 체감한다. 오랜 모임은 늙고 병든다. 불멸의 관계란 없다. 사멸하거나 소멸한다. 그 또한 자연의 하나다.
- 사람이 많이 모이면 말이 나고 탈이 난다. 잦아들 때 들어서고 흥할 때 관조하자. 
- 그래서 결국 '거리감'이다. 지구와 달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며, 나무와 나무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너무 붙거나 멀리 떨어지지 말자. 서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자.
- 그게 다 내 탓이 아니며 네 탓도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섭리가 그러할 뿐. 자책하지도 원망하지도 말자.

지난여름에는 평일 퇴근길에 풍광 좋기로 소문난 캠핑장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고 좋은 기억이 남았습니다.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산등성이 산등성 너머로 파도쳤다. 해발 600 고지에 위치한 마을은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였다.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며 험해서 강원도 오지의 그곳과 다를 바 없다. 차량의 통행이 뜸해 길섶의 수풀이 도로를 함부로 침범한다. 센이 치히로라는 이름으로 변하는 과정의 길처럼 미로처럼 설렘과 긴장으로 흥분되어 갔다. 산정에 오르자 크고 작은 숲과 산들이 강물처럼 바다처럼 북으로 동으로 굽이쳤다. 어찌하여 이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곳에 마을이 생겼고 거기에 더해 캠핑 사이트가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이곳에 올라 풍광을 보니 반갑고 또 고맙다. 
업무를 마친 후 떠난 길이어서 도착하니 곧 해가 저문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한다. 소금과 올리브유를 조금 넣은 물에 면을 삶았다. 마늘을 썰어 페페론치노와 함께 팬에 볶는다. 마늘이 노릇하게 익을 때쯤 삶은 면과 면수를 넣고 함께 볶았다. 맵고 뜨겁고 향긋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의 맛이 아주 좋다. 토마토와 생 모차렐라 치즈를 도톰하게 썰어 겹친 후 야채를 얹고 발사믹 소스를 뿌려 카프리제 샐러드를 만들었다. 와인과 곁들여 먹는다. 풍차 너머로 해는 지고 먼 호수 위로 물안개가 구름 되어 내게로 오른다. 뾰족 솟은 건너편 봉우리의 하늘이 보랏빛과 주홍빛으로 깊게 물든다. 마침 부는 바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을 흔든다.
내내 바람이 불었고 매미가 길고 슬프게 울었다. 거제도에서 내륙의 산들을 보고 싶어 왔다는 옆자리의 부부와 늦도록 술과 얘기를 나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장작불을 끄자 밤하늘의 빼곡한 별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텐트의 지퍼를 여미지 않고 매트 위에 누웠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감촉이 보드랍다. 사위가 고요하다. 적당한 포만감과 피로감으로 깊고 달게 잠이 들었다.

영월의 산과 계곡을 걷고 우당탕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텐트를 쳤던 트레킹에서의 기억은 이러했습니다.


여름 바람이 가득한 숲길을 걷고
소나기가 지나기를 기다려 텐트를 치고
별자리가 선명한 밤하늘 아래서 
서로의 음식과 술을 나누고
많은 얘기들로 소란한 밤을 보낸 후의 아침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
무엇을 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여행 중의 가장 좋은 순간


공장 마당에 열린 감을 따면서 이런 생각을 했네요.


공장 마당의 유실수에 열매가 열렸다. 손이 닿는 곳에 열린 감은 어르신이 먼저 땄고, 조금 높은 곳에 열린 감들을 박 부장과 최부장이 나무에 올라가 땄다. 석류나무에는 석류가 두 개 남았는데 그중 한 개를 땄다. 사무실 책장 위에 올려 두고 익기를 기다린다. 세상이 어떻든 꽃은 피고 지고 열매가 열고 단풍이 물들고 낙엽은 떨어진다. 이미 겨울인 몸과 마음도 그렇게 흘러라.


유난히 시끄럽고 어지러운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디론가 떠났고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여느 해와 같이 많은 고민들과 꽉 찬 생각들로 지내온 나날들입니다. 나의 삶 한가운데를 선명하게 관통한 지난해의 편린들을 모아 여기 이렇게 당신께 보냅니다. 보내는 저도 받으시는 당신도 내내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월 대한大寒 추운 날 오후 허성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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