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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Dec 14. 2015

한밤의 노래방

공황장애 진단 후, 두 달째

약을  처방받고 병원을 찾는 기간이 점차 길어졌다. 처음엔 일 주일치 약을 먹고 의사와 만났고 그 후에는 2 주일치 약을 받았으며 이번엔 약 4 주치 약을 받았다. 처방약은 처음과 동일했다. 한 달치나 되는 조제약을 받아 본 건 처음인데 약봉지가 작은  쇼핑백처럼 두툼했다. 한 달치 약이 담긴 봉투에서 약을 꺼내 먹다 보면 이 약들이 나를 편안하게 해 주겠거니 하는 안도감과, 저 약들을 꼭 먹어야만 버텨지는 내 한계의 좌절감이 교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만나는 텀이 길어진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우연히 겹친 두 번의 장례식과 어머니의 생일 파티를 주말에 몰아서 치르고 내려오는 기차 안. 티켓에 적힌 좌석 번호를  찾아가 보니 순방향과 역방향이 겹쳐서 네 명의 승객이 마주 보고 앉아서 가야 하는 자리였다. 그것도 내가 선호하지 않는 창 측 좌석.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는 평범한 체격의 남자가 이어폰을 꽂은 채 앉아있다. 잠시 후에 앞자리에 여자가 와서 앉았다. 테가 커다랗고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역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었는데, 바짝 무릎을 당겨 앉은 내 발에 자꾸 그 부츠가 와서 부딪쳤다. 그 여자 역시 내 발에 닿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마주 보는 좌석은 너무 좁았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비어있던 옆자리가 채워졌다. 옆자리의 남자는 대충 100 Kg은 돼 보였다. 남자가  앉아 헤드폰을 쓰고 휴대폰 게임에 집중하자 기차가 출발했다.



오후의 햇살이 역광으로 들어왔다. 햇볕은 테이블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덥다. 외투를 하나 벗었다. 답답하다.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었다. 호흡이 가빠진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었다. 문득 장례식과 생일 행사를 치르는 동안 약을 두 번이나 걸렀다는 게 생각났다. 다급하게 약을 꺼내 삼키고 호흡을 크게 반복했다. 자꾸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앞자리 여자의 부츠와 신발을 몇 차례 더 부딪쳤다. 선글라스에 가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내 행동에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의사의 말대로 '이건 가짜다'라고 되뇌었다. 차내 잡지를 꺼내 읽으며 거기에 집중하려 애썼다. 약기운 때문인지 나의 노력 때문인지 상태가 더 악화되는 건 피할 수 있었고, 옆자리의 남자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두어 번 자리를 비우는 덕분에 조금 더 숨을 쉴 수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기 10 분  전쯤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객차와 객차가  연결된 공간으로 나갔다.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후 상태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서 실망감이 들었다.



피곤에 지친 일요일. 늦잠에서 깨어 점심 무렵 아침을 먹었다. 약을 먹고 소파에 앉아 VOD로 영화를 한 편 본 후 다시 잠이 들었다. 어제 먹다 남긴 치킨으로 점심과 저녁 사이를 해결했다. 책을 읽다가 다시 잠이 들었고 깨어 보니 늦은 밤이다. 속이 더부룩하지만 체한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이 뻐근하고 괜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빈속이다. 햇반을 끓여 먹을 요량으로 냄비에 물을 붓고 레인지에 불을 켰다. 집이 너무 조용하다 느껐고 음악을 들을 생각으로 스피커 앞에 앉아 전원을 켰다. 무슨 음악을 들어야 할까... 아이패드를 꺼내 플레이 리스트를 뒤적이는데 액정에 습기가 번졌다. 투둑 떨어진 눈물이 아이패드에 번져 음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아침에 보았던 영화 때문일까.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던 남자의 소 같은 울음을 떠올렸던 걸까. 아니면 까닭 모를 지금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눈물일까. 예고 없이 터져버린 울음에 나 스스로 놀랐다. 울음은 고양이 단비가 내 옆에 와서 손가락을 핥아 주고 나서야 그쳤다. 밥을 끓여 먹고 약을 삼키고 나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밤길을 걷다가 네온이 켜진 노래방에 들어 갔다. 일요일 늦은 밤의 노래방은 텅 비어있었다. 물을 한 병 시켜 마시며 혼자 노래를 불렀고 다시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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