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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Feb 15. 2016

기러기 아빠가 명절을 보내는 법

어떻게 살 것인가?

오랜만에 장인어른의 제사에 참석했다. 용산의 손 위 처남 집에서 제사를 모셨다. 베트남에 계신 장모님과 아내와 아들 그리고 처제네 식구들을 빼고, 언젠가부터 관계가 불편해진 처형 부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식구들이 모였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한 행사인지 산자들의 위안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집안 격식대로 제사를 모시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제사 때 쳐 놓았던 커튼을 걷으니 동작대교의 조명을 반사하며 한강이 발아래로 흐른다. 수십 층 고층 아파트에서의 제사가 생경하다. 젊은 여자들은 피부 관리법이며 고급 화장품 얘기로 바쁘고 술을 곁들이지 않은 남자들 사이에선 맥 빠진 대화가 오간다. 내일이면 호찌민으로 떠날 처남네 식구들에게 베트남의 가족에게 전달할 물건들을 당부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홍은동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요강을 비우지 않았다고 어머니를 타박하는 소리다. 요즘 세상에 요강을 쓰는 일도 드물지만 본인이 채워 놓은 소변을 제때 치우지 않았다고 화를 낸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아버지에게 사과한 뒤, 아버지의 당 수치가 어떤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무리 남존여비의 시절을 겪어온 분들이라 해도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내키지 않지만 겨우 몸을 일으켜 밥상에 마주 앉았다.  으레 아버지의 밥상 잔소리가 시작된다. 가령 음식을 잘라 놓은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짜다거나 싱겁다거나 타박을 하다가 어머니가 겨우 앉아서 밥 숟가락을 뜰  때쯤이면 고춧가루나 간장 소금 후춧가루 등 갖가지 수발을 들도록 시킨다. 어머니는 적어도 서너 번은 음식으로 욕을 먹고 네댓 번은 밥상에서 주방을 들락거려야 식사가 끝난다. 수십 년을 보아온 한결같은 우리 집 밥상머리 풍경이다. 짜증을 내던 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 공장이 잘 돌아가는지 사뭇 다른 목소리로 묻는다. 난 언제나 단답형으로 답을 하고 후딱 밥을 먹어 치운다.




사촌 형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가을부터 유산 문제로 아버지 형제들 간에 다툼이 있었고, 그 후로 사촌들 사이도 멀어졌다. 요양원에서 7 년을 앓아오던 큰어머니가 지난해 말 돌아가셨고, 큰어머니의 49제가 있던 날 혼자 기거하시던 큰아버지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셨다. 49제에 모시러 큰아버지 댁에 들렸던 사촌 형 내외가 주검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건 물론이다. 집안의 맏형인 사촌 형은 재산 문제로 불편했던 때문에 큰어머니의 부고를 아주 늦게야 아버지 형제들에게 알렸고, 형수의 죽음에도 시동생들은 문상을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나는 상가를 찾았는데 거기서 또 사달이 났다. 바로 다음 주에 상주인 사촌 형의 외아들 결혼식이란 소식을  제삼자를 통해 듣게 됐다. 어머니는 너희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분기탱천했고 그 길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조카의 결혼식과 큰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는 모두 참석했지만 둘째 큰집에서는 아무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 후 맞이하는 첫 명절. 아버지의 고향 용인이 아닌 부천의 사촌 형 집에서 차례를 모셨다. 딸과 함께 참석해서 돌아가신 조부 조모와 백부 백모께 절을 했다. 첨예한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사촌 형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재산이 많건 적건 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의 크기는 동일하다. 분배에 대한 문제는 세 살배기 어린애나 80 넘은 노인이나 마찬가지며, 옹색한 집안이든 대재벌이든 차이가 없다. 역시 남는 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기숙사에서 나와 오피스텔에 입주 예정인 딸의 가구와 소품을 사러 들린 대형 가구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아버지와 단 둘이 마주 앉아 시달리느니 좀 걷더라도 바람이라도 쐬어 드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무릎이 불편한 어머니는 가구점 초입에서 이미 지쳐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너희들끼리 돌아 보라며 무릎을  움켜쥐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다.




작은 이모는 딸만 셋을 뒀는데 출가를 했지만 지금은 일산에서 딸들과 사위들과 외손주들이 모두 모여 산다. 내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몰라도 처음으로 그 집 식구들을 찾아 점심을 샀다. 뜻하지 않은 조카의 방문에 이모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나와 동갑인 매제는 날 반겼고, 명절에도 출근한 셋째 매제는 나오지 못했고, 직장을 잃은 둘째 매제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사촌이나 이종사촌이나 서먹하긴 마찬가지다.




긴 연휴를 마치고 구미의 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꽉 막힌 상행선과는 달리 하행선은 막힘없이 달린다. 용인을 지날 때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부친의 부고를 전한다. 차를 되돌려 막힌 길을 거슬러 분당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세밑의 장례식장은 썰렁했고 상을 당한 친구는 차분해 보였다. 붉은 십자가가 놓인 초상에 절을 두 번 했다. 친구와 마주 앉아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었다. 감리 일을 하는 친구는 다음 달이면 지금 현장일이  마무리된다며 이후의 일거리를 걱정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산 사람의 먹고 살 거리를 얘기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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