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몸담았던 '조직'을 떠나며
이번 달 들어서 혼자 사는 집에서 혼자 머무는 사무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생활은 5년째, 혼자만의 사무실은 평생 처음이다. 내 삶은 절반은 배우고 익히고 국가에 의무를 행사하는 일에 썼고, 나머지 절반의 삶은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일에 썼다.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의 나는 직원 열두 명과 함께 기계 몇십 대를 놓고 임가공 제조업을 운영하는 연사업체 치고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회사의 사장이다. 지난달 말까지는 내 회사에 하청을 주는 회사의 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갑자기 회사를 떠나게 됐고,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혹은 너무 늦게 독립을 하게 됐다. 적어도 1 년에서 5 년은 겸직을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퇴직이 닥쳤으니 빠른 셈이고, 독립을 전제로 처가의 회사에 임시로 입사를 했으나 만 12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회사에 근무를 했으니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다.
변변치 않은 대학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졸업을 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선배의 회사에 취직을 했다.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사진식자를 하면서 수작업으로 간단한 인쇄용 디자인을 해 주는 회사였다. 사장인 선배는 방산시장 골목에서 낮술을 자주 했고 나는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두어 달만에 퇴사를 했다. 애초에 월급 줄 형편이 못 되는 형이 무슨 생각으로 날 채용했는지 모르겠다. 받지는 못했지만 당시 책정됐던 월급은 25만 원이었다.
선배의 회사와 거래하던 또 다른 선배에 의해 난 임시직으로 정치광고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당시 초대 지방자치 선거가 치러졌고 회사는 돈을 꽤 많이 벌었다. 결국 첫 월급은 그 회사에서 받았고 선거가 끝난 후 보너스까지 두둑이 받았으며, 제주도로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그때 받은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빨간 내복이 아닌 최신형 세탁기를 사 드렸다.
정치광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눈에 들었던지 난 선배의 회사에 정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소위 '나까마'로 인쇄를 하던 회사였고 사장과 사장의 아들인 선배 그리고 나와 경리 여직원이 직원의 전부인 회사였다. 입사 후 회사는 규모가 커졌고 '나까마'가 아닌 인쇄광고를 수주하는 단계까지 성장했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 외주관리직원 등을 충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디자이너로 입사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난 또 다른 선배와 함께 동업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직원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관계로 출판사를 차렸다. 내가 디자인하고 인쇄와 제본까지 진행했던, 일인출판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은 나의 첫 책을 출간했다. 기획의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영업에는 젬병이었던 선배와 나는 종이접기 책을 몇 권 출간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아야 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연애하던 아내와 결혼을 했다.
출판사를 접고 외국계 광고회사의 공채에 응시했는데 합격을 했다. 공채 합격 통지를 받던 날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종로의 어느 공중전화 부스에서 아내에게 합격 소식을 전했는데 아내는 첫 애를 가졌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 아내의 떨리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때까지의 내 생애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상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다.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면 감각이 정체되기 마련인 때문이다. 여러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꽤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했다. 난 때로는 디자이너로 AE로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광고주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으며, 비딩에서 높은 승률을 자랑했다. 당시 알만한 대기업의 많은 광고에 직간접으로 관여했다. 대리에서 과장 차장 부장 실장을 거쳐 이사까지 고속으로 승진했고, 어디서든 나름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짜릿한 성취감을 여러 번 맛봤으며 자존감이 높아갔다.
전직을 결심한 건 성취감이나 자존감만으로는 현실 생활을 담보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랐고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부모님은 늙어 갔다. 당시 날로 사업을 확장해 가던 손윗 동서의 제안 또한 매력적이었다. 나고 자랐던 서울 생활을 접고 동서가 운영하던 공장 중 하나가 있던 구미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지금보다 더 모든 게 불확실했고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낙하산으로 떨어진 나를 경상도의 토박이들은 터부시 했다.
나를 데려다 놓은 사람은 그야말로 떨어 뜨려 놓은 것 외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 난 그와 그들에게 그리고 월급에 길들여져 갔다. 입사 당시의 독립 약속은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으며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다시 서울로 그리고 베트남으로 또다시 칠곡으로 가리키는 대로 옮겨 다녔다. 그 12 년이란 세월 동안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만큼의 질투와 시기를 샀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는 만큼 자존감은 낮아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질 즈음 난 반쯤 잊거나 포기했던 독립을 이뤘다.
오늘 내가 디자인한 C.I.를 간판으로 제작해 6평 컨테이너 사무실 입구에 달았다. 달아 놓은 간판을 바라보며 히메네즈가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을 때처럼 오른손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몇 차례 쳤다.
당분간은 나에게 휴가를 줄 생각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고, 무이네 해안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들이키고, 코스타리카와 페루 그리고 쿠바를 여행해야겠다. 내 삶을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