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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Nov 07. 2016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11월 항쟁의 서막을 열며


기차와 전철을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에 막 도착했을 때의 직감대로 인파의 물결은 광장과 인도를 넘어 차도를 메워갔다. 딸아이와 친구 일행을 맞이하러 조선일보사 앞으로 걸었다. 광화문 네거리의 드넓은 도로 역시 피켓을 든 시민들의 긴장감과 폭발할 듯한 열기로 가득했다. 광장 한편에 사람들 틈새로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무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연사의 모습과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집회 분위기가 고조될 무렵 참가자들의 행진이 시작됐다. 군중들의 후미에 섞여있던 우리는 뒤돌아 출발하는 행렬의 선두가 됐다. 광화문광장의 시민들과 청계광장의 군중이 합류해서 인파는 종로 3가 쪽으로 굽이쳐 흘렀다. 행렬의 끝이 어딘지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커다란 조류에 휩쓸려 청계천을 지나 명동으로 남대문으로 시청을 지나 다시 광화문으로 함께 행진했다.



1987년 6월. 난 지금 옆에서 함께 걷는 딸아이 또래의 대학생이었다. 그해 여름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죽은 연세대생 이한열의 관을 메고 신촌에서 시청 앞까지 백만 군중과 함께 걸었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 역시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숨진 농민 백남기의 장례가 이곳에서 치러졌다. 오늘 모인 수십만이 다음 주말이면 백만이 되어 시민의 함성이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우리라. 역사에 길이 남을 11월 항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87년 이한열의 노제는 평화적으로 치러졌지만 그날만을 제외하면 서울 거리는 평화롭지 않았다. 경찰이 던진 사과탄이 안개처럼 종로를 뒤덮었다. 넥타이를 맨 시민과 청바지를 입은 청년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고 찌라시를 뿌리며 백골단을 피해 청계천을 달렸다. 셔터를 반쯤 내린 식당의 주인은 시위대에게 물수건을 나눠줬고 제과점 주인은 배고픈 학생들에게 빵을 돌렸다. 의사 간호사와 의대생들은 흰 가운을 입고 부상당하거나 최루탄을 심하게 뒤집어쓴 시민들을 거리에서 치료했다. 숨이 턱에 차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어느새 골목 상점 주인이 문을 열어 경찰로부터 숨겨 주었다.



오늘 명동거리엔 그때의 시민들 대신 해외 관광객들이 스마트폰으로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시민을 찍어댔다. 스피커를 실은 트럭에서 행진을 주도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30년 전의 외침이 '독재타도' '호헌철폐'였다면, 지금은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도 공범이다'로 바뀌었다. 행렬에서 가장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교복을 입은 중고생들이었다. 젊은 부모의 손을 잡고 따라 걷는 어린아이들은 지친 기색도 없었다. 부하의 총탄에 맞고 죽은 독재자는 세월이 지나 딸에게 청와대를 물려줬고, 스무 살에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던 나는 성인이 된 딸과 함께 그 거리를 걷는다. 그 시절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끓어올랐던 가슴은, 무속 국가가 되어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오욕으로 참혹하다. 시국이 시민의 힘을 필요로 할 때마다 가능한 광장에 서고자 했던 나는 고작 이런 나라를 딸에게 물려준 것인가. 어느덧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 함께 걷는 청년학생들 그리고 딸에게 이토록 부끄러운 적이 있었던가.


아니지. 지금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거나 탄식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 함민복의 시처럼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다시 걸어가야겠다.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게재된 모든 사진은 모글리님이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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