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했던 출장기
간신히 새벽잠을 깨어 옷을 꿰어 입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현관 밖에는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올 들어 처음 내린 폭설이 하필이면 출장 가는 날과 겹쳤다. 어깨에 배낭을 메고 눈 때문에 끌 수 없는 육중한 캐리어를 들고 주차해 둔 곳으로 향했다. 어젯밤 주차장을 몇 바퀴 돌아 빈자리를 찾아 차를 지하에 세워 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남쪽 지방 소도시에 제설작업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일찍 출발했지만 톨게이트에 겨우 도착해서 계산해 보니 공항까지의 시간이 빠듯했다. 고속도로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눈길에 익숙하지 않은 지방의 운전자들은 거북이 운전이었다. 대구를 지날 즈음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택시가 없어. 여러 곳에 콜을 해 봤지만 운행하는 택시가 없대. 어쩌지?" 대학생 인턴십 활동으로 대기업에 출근을 시작한 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차를 태워 줄만한 지인을 생각해 봤지만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출근한 직원에게 사적인 부탁을 하는 일도 마땅치 않았다. 수화기를 든 채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동안 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진출로를 놓치고 지나쳐 버렸다. "딸, 아빠가 길을 잘못 들었네. 비행기 놓치게 됐어. 네가 알아서 해결해 봐" 딸의 출근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톨게이트로 나가서 되돌아 들어와 놓쳤던 길로 접어들었다. 시간이 더욱 빠듯했다. 길은 여전히 미끄러웠지만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보딩 시간을 얼마 앞두고 공항에 도착할 즈음 주차대행 서비스 회사에 전화를 했다. 곧 온다던 기사는 비로 변한 눈을 한참 맞고 기다려서야 느긋하게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은 북새통이었다. 기나긴 줄의 끝에 섰고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항공사 직원이 "호찌민 가시는 손님 계세요?"라고 소리쳤다. 냉큼 손을 들고 맨 앞으로 나가 수속을 마치고 짐을 부쳤다. 검색대를 통과할 때는 닫혀있던 검색대가 새롭게 열려서 가장 먼저 통과했고, 전자여권을 가졌기에 이미그레이션도 빠르게 통과했다. 면세점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지만 꾹 참았던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게이트로 향했다. 탑승하려는 승객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프레스티지 승객들이 모두 탑승을 마쳤는지 항공사 직원이 이코노미 탑승권을 가진 나를 한산한 게이트로 안내했다. 공항에는 가장 늦게 도착했지만 비행기에 들어서니 이코노미석 승객 중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탑승한 셈이 됐다. 딸아이는 한 시간 가까이 걸어서 출근했고, 셔틀버스는 더 늦게 도착해서 인턴십 일정을 소화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전화가 왔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는 만석이었는데 대부분의 승객이 베트남인 엄마와 자녀들이었다. 한국으로 시집 온 베트남 신부들이 명절을 앞두고 아이와 함께 고향방문을 하는 걸로 보였다. 나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입국장에서도 출국 때와 마찬가지로 닫혀있던 입국심사대 문이 새롭게 열려서 기다리는 일 없이 빠르게 통과했다. 길에서 애를 태우긴 했지만 이후로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출국장 밖에서는 호찌민에서 아들과 거주 중인 아내가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짐만 찾으면 출장 일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주어진 만 하루의 휴식 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타고 온 비행기에서 쏟아져 나온 화물은 엄청난 양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친인척을 위해 준비한 한국산 제품들을 바리바리 싸 온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두꺼운 겨울 옷을 벗고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2 층 대기실에서 나를 보고 손짓하는 아내가 보였다. 컨베이어를 통해 끝없이 쏟아져 나오던 짐들이 점차 줄어들었고 각자의 짐들을 찾아 떠난 승객들로 대합실은 조금 한산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윈도 밖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카톡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 또한 기다림에 지쳐갈 즈음 아오자이를 입은 항공사 직원이 나타났다. 나처럼 짐을 찾지 못한 승객 30여 명을 이끌고 그녀가 인도한 곳은 '분실물 센터'. 직원 서너 명이 일하는 분실물센터는 나와 함께 합류한 서른 명을 포함해서 짐을 찾지 못한 승객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일본인으로 보이는 승객이 내 앞에서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 중이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청사 내부를 돌며 짐을 찾아봤냐고 직원이 물었고 승객은 이미 몇 바퀴를 돌아봤지만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게도 같은 질문을 할게 뻔했기에 공항 청사를 샅샅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다시 분실물 센터로 가서 직원의 '명령'대로 서류를 작성했다. 인적사항과 현지 주소와 전화번호 외에 캐리어의 색상과 크기 등을 적어서 냈다. 직원은 6시에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짐이 출발했는지 아닌지라도 알려달라고 물었다. 아오자이를 입은 50 대 여성 직원은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알려 줄 수 없으니 숙소로 가서 전화를 기다려"
"짐이 출발했는지 안 했는지도 몰라?"
"몰라. 당신 같은 사람들 뒤에 줄 서있는 거 보이지? 가서 기다려"
"정말 전화는 줄 거지?"
"전화 줄게 기다려. 만일 전화가 안 오면 거기 프린트물에 전화번호 있지? 거기로 전화해"
터덜터덜 게이트를 걸어 나왔다. 출국장 밖은 70년대 김포공항에서 파독 광부나 간호사를 맞이하는 가족을 맞이하는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승객 1 명당 적어도 10 명 이상의 환영객이 나와서 고향을 찾아온 가족과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간신히 아내를 만났다. 아내도 나도 심신이 지쳐 집으로 향했다. 현지 법인의 베트남 직원과 한국의 여행사 직원을 동원해서 내 캐리어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베트남 직원은 6 시에 전화를 주겠다는 공항직원의 말을 재 확인했고, 한국 직원은 김해공항과 베트남항공 한국지사 어디도 통화가 안된다고 했다. 회의자료며 갈아입을 옷이며 가족들에게 줄 선물 등이 들어 있는 가방이 없으니 답답했다. 공항에서 약속한 시간인 6시에 전화는 오지 않았고 이후에 여러 번 프린트물의 번호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맥주를 들이킨 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한국의 여행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화물은 어젯밤 부산에서 하노이로 출발했으며 국내선을 통해 하노이에서 호찌민 탄손녓 공항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했다. 일단 안도했지만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어제 짐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면 밤새 애를 태우지 않아도 됐을 일 아닌가. 아내와 함께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분실물 센터로 가기 위해서는 게이트를 두 개 통과해야 했는데 첫 번째 문에는 위압적인 표정의 공안이 서류를 한참 살펴본 후 통과시켜줬고, 두 번째 문에는 공항직원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동작으로 서류를 작성한 후 통과시켜 줬다. 분실물 센터에서는 내 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직원에게 항의했다.
"어제 캐리어가 도착했다는데 왜 전화 안 줬어?"
"미안한데 여기 많은 짐들 보이지? 우리가 다 처리할 수 없어"
"전화는 왜 안 받았어?"
"어제는 30 명이 짐을 못 찾았는데 오늘은 150 명이야. 바쁘니까 가봐. 미안해"
"나 클레임 할거야"
"24시간 내에 찾으면 클레임 안돼"
"헐... 말이 돼?"
"대신 다음에 탈때 짐 무게나 좌석 배정 같은 건 신경 써 줄 수도 있어"
다행인 건 짐을 내주는 직원은 그래도 생긋 웃어 줬다. 베트남 사람들의 표정이 늘 그렇듯, 비웃는 건지 미안한 건지 구분하긴 어렵지만 엄숙한 표정보다는 나았다. 이후 일정부터는 짐을 부치지 않고 무겁더라도 기내로 끌고 들어가 들고 다녔다. 해외여행을 하는 분들이여, 공항에 일찍 도착해서 먼저 짐을 부치시라. 나처럼 밀려서 짐이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