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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 Jan 31. 2017

아버지의 글씨

다시, 병원의 목요일

병원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만난 아버지의 주치의이자 신경과 과장은 비교적 젊은 여의사였다. 의외라고 생각한 건 내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일 테다. 설 연휴를 앞두고 있는 데다 퇴근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의사는 조급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방에서 올라와 자신을 오래 기다렸다는 이유에서였는지 아버지의 상태를 잘 설명해 주려 애썼다. 의사는 자신의 모니터를 통해 아버지의 뇌 MRI 사진을 보여줬다. 마우스를 움직일 때마다 계단을 오르내리 듯 뇌의 단층들이 보였다. 가장 심한 부분의 사진은 뇌의 1/4 가량이 하얗게 부어있음을 보여줬다. 뇌혈관이 막혀서 혈액이 공급되지 못한 부분이 손상을 입은 것이라 했다. 사진에는 손톱만 한 크기로 까맣게 죽어있는 부분이 곳곳에 보였는데, 2003년과 그 후 두 번에 걸쳐 뇌졸중 증세로 입원했던 흔적이었다. 의사는 아버지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경우라고 했다. 피를 묽게 하는 약물을 투여해서 혈액이 원활히 공급되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당분간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병실의 아버지는 겉보기에 평온해 보였다. 아버지의 증세는 단지 글씨를 읽지 못는 거였다. 팔다리의 움직임이 다소 불편해 보였지만 크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다. 뇌에 큰 손상을 입었음에도 그 정도의 증세라면 현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령인 데다 불과 몇 달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은 몸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포장지 등에 인쇄된 단어를 몇 개 보여드렸는데 한 아버지는 한 음절을 채 읽지 못했으며 자음 몇 개를 간신히 알아봤다. 아버지와 함께 늙어 온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고 나는 막막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막막했고, 앞을 알 수 없는 막연함이 답답했다.


지난해 말, 대장암 수술 후 퇴원하는 길에 나는 아버지와 다퉜다. 당시 아버지는 함께 쓰는 병실의 다른 환자들을 배려하지 않았으며, 병수발을 드는 어머니를 늘 그랬듯 평생을 그래왔듯 함부로 대했으며, 담당 간호사에게 무례했다. 그 부분을 지적하는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지방에서 수시로 서울의 병원을 오가는 내 수고에 대한 아버지의 치하를 바라는 건 언감생심이었으며, 수술비와 입원비를 모두 지불한 아들의 부담은 당연히 여겼다.


병실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는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아이처럼 온순했다. 화를 내면 병세에 좋지 않으니 차분히 계시면 좋겠다는 당부에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일은 어떠냐며 내 공장의 운영상태를 걱정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든 일이 혼돈스러울지, 불안과 걱정에 가득할지, 어쩌면 겉모습처럼 평온할지, 아니면 나처럼 그저 막막할까.


그 와중에 어머니는 혼자 사는 아들을 위해 부리나케 장을 봐다가 만든 반찬을 쥐어준다. 어머니의 손발이 푸석하게 말라있다. 글을 읽지 못하게 된 아버지를 위해 약을 챙겨 드시기 쉽도록 약통을 사다 드리라는 간단한 심부름을 딸에게 시켰다. 유럽여행을 앞둔 데다 며칠을 할머니 집에서 지내느라 지루해진 딸은 심부름이 싫은 내색을 했다. 머리가 큰 딸에게 거의 처음으로 크게 화를 냈다. 딸은 며칠을 울었다.


연휴기간 세워두었던 공장은 차가웠다. 혼자 쓰는 공장의 사무실도 냉골이었지만 며칠 전 봉오리를 맺고 있던 난이 꽃을 피웠다. 춥고 좁은 사무실에 난꽃 내음 높고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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