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비가 내린다. 역전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의 열기와 함성을 뒤로하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를 분주히 오가는 수많은 발걸음에 가벼운 현기증이 났고, 비에 젖은 사람들의 몸에서는 묵은 냄새가 났다. 서울로 돌아왔다. 내게 서울은 청춘이다. 학창시절과 신혼을 온전히 서울에서만 보냈으니 그렇다. 지방과 해외로 떠돌다가 십여 년 만에 여행자로 찾은 서울이다. 중년이 된 지금도 내게 서울은 여전히 젊음의 도시로 남아 있다. 상념 속에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맑게 개었다. 바람이 차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19년 전에 지금의 아내와 웨딩 촬영을 했던 경복궁으로 향했다. 경복궁 옆 미술관으로 향하는 도로의 은행잎은 19년 전의 그때처럼 샛노랗다. 팔짱을 꽉 낀 청춘의 남녀가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며 앞서 걷는다. 그 시절의 우리처럼 속삭이며 걷는다. 돌담도 나무도 모두 그대로다. 변한 건 중년에 접어든 내 나이와, 도로에 넘치게 깔린 경찰들의 형광색 제복뿐이다.
▲ ohmy 01전시장 입구 ⓒ 허성갑
경복궁을 다시 찾은 건, 근방의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라이언 맥긴리(RyanMcGinly)의 사진전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공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나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사진작가가 된 라이언의 이력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미국 휘트니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최연소 개인전을 개최했다는 사실은 미술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미술관 외벽담장에 슈퍼 그래픽으로 장식된 그의 사진이 흥미를 끈다. 개인주택을 매입해 개조한 미술관의 설계 또한 독특하다.
▲ The Kids are Alright 1 ⓒ 허성갑
2층 전시장에 걸린 라이언 맥긴리의 첫 번째 작품 앞에 섰다. 청바지를 입고 캔버스 운동화의 끈을 질끈 묶은 젊은이가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 라이더의 팔뚝에 새겨진 알록달록한 문신이 가벼운 일탈을 암시한다. 라이언은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자전거를 탄 친구의 뒤에 올라탔다. 수백 컷을 찍고서야 이 사진 한 컷을 건졌다. 나는 젊은 용기와 달콤한 신혼의 꿈으로 가득했던 19년 전의 청춘 시절로 돌아가서, 라이언 맥긴리와 여행을 시작한다.
2층 전시장은 'The Kids are Alright(청춘, 우리는 괜찮아)' 시리즈다. 첫번째 사진 옆에는 옆집 아저씨와 주먹질을 하다가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든 라이언의 아버지가 해맑게 웃으며 서있다. 그 옆의 사진은 라이언의 절친이자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대시 스노우다. 그는 2009년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라이언은 친구 대시 스노우에 대해 ' 내가 찍고 싶었던 모든 것, 내가 되고 싶었던 모든 것, 제멋대로이며 무모하고 무신경한 거침의 집합체'라고 표현했다. 라이언 맥긴리의 모델들은 모두 친구 또는 가족이다. 라이언은 뷰 파인더를 통해 피사체를 바라 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사진 속의 모델들과 함께 있다. 청춘은 우정이다.
▲ Road Trip 2 ⓒ 허성갑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 속 모델들은 모두 누드로 등장한다. 그저 옷을 벗었을 뿐이 아니다. 대여섯 명의 모델들이 하나의 욕조에서 함께 목욕을 한다. 옷을 벗은 남성 둘이 서로 입을 맞춘다. 누드로 사막을 뒹굴거나 트램폴린 위를 점프한다. 심지어 정사장면을 사진에 담기도 했지만 천박하지 않다. 선정적이거나 외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라이언은 친구들의 벗은 몸을 통해 청춘의 자유분방함을 표현하고자 한다. 모델들 역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런 일상을 즐긴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젊음 속으로 빠져든다. 친구의 장난에 터지는 모델들의 웃음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사진 속 욕조의 물방울들이 튀어 내 발등을 적신다. 청춘은 도전이다.
▲ Moon Milk ⓒ 허성갑
불꽃처럼 터지는투명한 레드.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딘지도 모를, 낮과 밤조차 구분할 수 없는 곳. 칠흑 같은 어둠의 동굴. 그곳을 비추는 한 줄기 빛. 라이언이 숭고하고 연약한 젊음과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청춘을 표현한 문 밀크(Moon Milk) 시리즈.
라이언은 인위적인 장치를 배제하고 사진작업을 하기 때문에 얼핏 아마추어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어두운 동굴 속에서 12시간 이상을 작업했다. 단 한 장의 사진을 건져 내기 위해 수천 번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라이언과 그의 모델들의 노력에 탄복한다. 청춘은 열정이다.
▲ Road Trip - Highway ⓒ 허성갑
라이언 맥긴리와의 여행은 동굴을 나와 바깥세상으로 연결된다. 2003년부터 각기 다른 그룹의 친구들과 미국을 횡단하며 찍은 로드트립(Road Trip)시리즈. 뭉게구름이 떠 있고 숲으로 둘러싸인 풍광 좋은 고속도로다. 몇몇의 남녀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무단으로 뛰어서 건넌다. 한 번쯤 꿈꾸는 젊은 시절의 일탈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로운 청춘의 특권이다.
이 사진은 아이슬란드 락밴드 시규어로스(Sigur ros)의 다섯 번째 정규앨범 자켓 사진으로도 쓰였다. 오직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 관람하러 온 관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이다. 나는 어느새 답답한 옷을 벗어 던진 채, 사진속의 젊은이들을 따라 도로를 질주한다. 청춘은 모험이다.
새하얗게 태워버린 몇 번의 밤들 마치 우리의 전부인 것처럼 끝날 줄 모르는 불빛과 지칠 때까지 이곳과 저곳에서 꽃이 피었다는 소식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무의 그늘처럼 너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너라는 네가 있다는 직감이 있다면 - 유희경 시
전시장 벽면에는 라이언 맥긴리의 작품에 영감을 얻은 시인 유희경의 시가 곳곳에 프린트 돼있다. 스마트폰에 대림미술관의 앱을 다운받으면 유희경 시인의 목소리로 그의 시 낭송을 들을 수도 있다. 미술관 앱에서 권정민 수석 큐레이터의 작품 해설을 들으며 사진을 감상하면 느낌이 배가된다.
관람객이 자유롭게 전시작품이나 미술관 내부를 촬영할 수 있다는 점도 이 미술관의 특징이다. 관람객을 배려하는 새로우며, 열린 형태의 운영방식이다. <청춘, 그 찬란한 기록>이라는 전시회의 타이틀과도 부합한다.
▲ Animals ⓒ 허성갑
전시장 3층에는 라이언 맥긴리의 작업 방식으로는 드물게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작품들이 걸려있다. 사슴, 카멜레온, 원숭이, 고슴도치 등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등장시킨 사진들이 이채롭다. 동물들과 함께 역시 누드 모델이 등장한다.
여기서 사람은, 주인공인 동물들의 소품일 뿐이다. 일정한 통제가 어려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물들과의 작업. 생쥐가 목을 타고 모델의 입안으로 들어간다. 카멜레온이 긴 혓바닥을 내밀어 여성 모델의 귀를 핥는다. 모델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어린 사슴의 눈빛이 영롱하다. 라이언은 이 예측 불가능한 작업을 즐겼고, 수준 높은 작품을 완성했다. 청춘은 실험이다.
▲ Everybody Knows This is Nowhere ⓒ 허성갑
서른 명의 누드가 한쪽 벽면에 빼곡하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라이언의 지인이 아닌 모델들이다. 락페스티벌이나 아트스쿨 또는 길거리에서 캐스팅 했다. 패션모델 포토그래퍼 등 모델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사진의 배경을 제외했으며, 조명만으로 효과를 줬다는 점도 특색 있다. 보정 작업을 거의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진 속 인물들은 관람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젊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서른 명의 모델들은 표정과 포즈 그리고 피부색과 인종이 모두 다르다. 청춘은 개성이다.
▲ Morrissey ⓒ 허성갑
4층. 여행의 종착점이다. 나른한 음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다. 한쪽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금발의 여자아이가 뉴욕 시내를 나풀나풀 뛰어다닌다. 라이언 맥긴리가 기획한 영국가수 모리세이(Morrissey)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다.
다른 세 개의 벽에는 시규어로스의 라이브 공연에 참석한 관객들의 표정을 담은 사진들이걸려있다.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를 듣는 동시에, 공연에 몰입한 관객들의 표정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 라이언의 기분은 어땠을까? 자신의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다는 건 바로 성공한 인생이다. 청춘은 특권이다.
▲ 경복궁 은행나무 ⓒ 허성갑
라이언 맥긴리는사진을 통해 '청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던진다. 미술관을 나서서 경복궁 경내로 걸어 들어갔다. 어색한 포즈로 야외촬영을 할 때, 배경이 됐던 19년 전의 은행나무가 여전한 채 바람에 잎을 떨군다. 청춘은 육체적인 나이와 무관하다. 욕망이 쇠락한 젊은이와 생각이 젊은 중년을 얼마든지 발견한다. 나이가 젊었거나, 나이는 들었지만 정신이 젊은 청춘들이여. 가을이 가기 전에 거리로 나와 라이언을 만나라.
전시회 관람 팁
- 대림미술관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입장료를 할인받을 수 있다. - 휴대폰에 대림미술관 앱을 다운받으면, 미술관 큐레이터의 작품 설명을 들을 수 있다.(이어폰 지참) - 도슨트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 입장하면, 재밌는 설명과 함께 선물을 받을 기회도 있다. - 작품 촬영이 가능하므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 2층 슈팅 스튜디오에 가면, 작품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폰으로 바로 다운받을 수 있다.